요즘 어딜 가나 ‘폭싹 속았수다’를 이야기한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일찍 부모를 여읜 애순(아이유)과 그녀를 애틋하게 챙긴 관식(박보검)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키우는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정말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따스하고 잔잔한 이야기로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다. 지난달 굿데이터코퍼레이션이 발간한 화제성 조사 ‘펀덱스 리포트’에서도 드라마 부문 1위를 차지했다.

한국 사회에 ‘무해력(無害力)’이 뜨고 있다. ‘해롭지 않은 힘’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작고 귀엽거나 서툴지만 순수한 존재가 지닌 강력한 힘’과 이러한 ‘무해한 존재들에 열광하는 세태’를 가리키는 신조어다. 대중은 ‘폭싹 속았수다’나 판다 푸바오, 미니어처 피규어나 특별하지 않지만 평온한 숲 등 무해력을 갖춘 대상들과 열애에 빠졌다. 얼마 전까지도 ‘도파민’을 내세운 자극적 방송이 유행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순하고 작고 귀여운 것들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무해력의 유행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유해한지 드러낸다. 올해의 키워드 중 하나로 무해력을 예고한 ‘트렌드 코리아 2025’는 “경제 불황과 불안한 미래, 날로 심해지는 정치·사회적 갈등, 코로나 블루에 이은 코로나 레드(분노)에 지친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긁힌 세대’라 부르며 자조한다. 이러한 암울함의 반작용으로 귀엽고 순수하고 단순한, 해롭지 않은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주인공 애순(아이유)과 관식(박보검). 따스하고 무해한 서사에 공감하며 위로 받았다는 반응이 많다. /넷플릭스

◇순한 맛 콘텐츠가 떴다

‘펀덱스 리포트’에서 ‘폭싹 속았수다’에 이어 2위에 오른 MBC ‘언더커버 하이스쿨’, 3위 SBS ‘보물섬’, 4위 tvN ‘그놈은 흑염룡’ 중 ‘보물섬’을 제외하면 긴장감 없이 편하게 웃으며 볼 수 있는 드라마들이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감자연구소’와 ‘빌런의 나라’, 이달 12일 공개되는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도 자극적이지 않고 무해하다.

정덕현 문화 평론가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드라마와 예능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른바 ‘순한 맛’ 콘텐츠가 주목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이맘때 ‘살인자ㅇ난감’ ‘내 남편과 결혼해줘’ ‘피라미드 게임’ ‘밤에 피는 꽃’ 등 장르물이거나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콘텐츠의 시청률과 화제성이 높았던 것과 비교하면 흐름이 사뭇 다르다.

요리 예능 ‘에드워드 리의 컨츄리쿡’. /tvN

무해력의 인기는 예능 프로에서도 감지된다. 넷플릭스 미드폼 예능(30분 안팎의 콘텐츠) ‘주관식당’은 코미디언 문상훈과 요리사 최강록이 게스트가 주문한 음식을 자체적으로 해석해 ‘주관식 요리’를 만든다. 내향적인 최강록과 문상훈이 주춤거리며 음식을 대접하는 모습, 편안한 분위기와 소소한 대화가 무해한 재미를 준다. 채송이 PD는 “시청자들이 ‘슴슴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좋아하는 식당의 맛이 변하면 서운하니 그 슴슴함을 잘 유지하겠다”고 했다. 이 밖에도 ‘도라이버: 잃어버린 나사를 찾아서’ ‘추라이 추라이’ ‘미친 맛집’처럼 편안한 웃음을 주는 예능이 많아진다.

무해력 콘텐츠는 고성이 오가는 심한 갈등 자체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을 핵심 소비자로 겨냥한다. tvN은 올해 무해력을 상징하는 제철 음식과 시골 풍경 같은 키워드는 에드워드 리 셰프의 요리 예능 ‘에드워드 리의 컨츄리쿡’이나 ‘알쓸별잡: 지중해’ ‘언니네 산지직송2’로 풀어낸다. 모두 호흡이 빠르지 않고 안락하다. 시트콤 ‘킥킥킥킥’과 ‘빌런의 나라’를 연이어 편성한 KBS는 “희망이 부족한 현실 속에서 지친 삶을 위로하는 웃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앞발을 들어 올린 레서판다. 위협적이기는커녕 귀엽다. /인터넷

◇무해하지만 힘이 세다

무해력을 지닌 사물은 작고 귀엽지만 그것을 다룬 콘텐츠나 상품은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작은 인형이 달린 키링이 대표적 아이템. 스마트키와 스마트폰이 일상화되면서 열쇠(키)가 더는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다. 덩달아 사라질 운명이던 키링은 백팩과 핸드백을 꾸미는 액세서리로 돌아왔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인형 키링이 특히 인기. K팝 아이돌 NCT 사쿠야의 가방에 주렁주렁 달린 여러 개의 키링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키링이 주렁주렁 달린 NCT 사쿠야의 가방. /인스타그램

캐릭터 시장에서는 ‘먼작귀’(먼가 작고 귀여운 녀석)로 불리는 일본 캐릭터 ‘치이카와’가 단순하면서 귀여운 디자인과 무해한 매력으로 MZ세대를 사로잡았다. 인스타그램 공식 계정 팔로어가 18만을 돌파했고, 서울 팝업 스토어는 오픈런이 발생할 정도로 폭발적 호응. 웹툰에서도 무해력의 공기가 느껴진다. 웹툰 ‘마루는 강쥐’는 강아지 마루가 사람이 돼 벌어지는 동화 같은 이야기. 귀여운 캐릭터로 10~20대에서 강력한 팬덤을 형성했고, 카카오 이모티콘으로도 출시됐다.

무해력의 대표 동물로 거론되는 판다 푸바오가 중국으로 떠나자, 더 작고 귀여운 ‘레서판다’가 그 상실감을 달래주고 있다. 에버랜드 공식 채널 중 레서판다만 다루는 ‘오구그레서’의 SNS 누적 조회 수는 1년 만에 400만을 넘겼다. 몸길이가 60cm로 판다보다 훨씬 작은 레서판다는 ‘세계에서 가장 귀엽게 위협하는 동물’로 꼽힌다. 가장 공격적인 행동은 앞발을 들어 ‘만세’ 포즈를 취하며 몸을 세우는 것. 위협적이기는커녕 귀엽다.

웹툰 '마루는 강쥐'(왼쪽)와 일본 캐릭터 ‘치이카와’. /인터넷

무해력을 지닌 이들은 순수하고 서툴다. 걸그룹 뉴진스 멤버 하니(본명 하니 팜)가 “뜬겁새로(뜬금없이)” “후두다닥(후다다닥)” “양념페이프(양면테이프)” “알록달락(알록달록)” “엉망잔칭(엉망진창)”이라고 틀리게 말하는 걸 팬들은 ‘팜국어’ ‘팜투리’라 부르며 사랑스럽게 여긴다. 베트남계 호주인으로 한국어가 서툴 수밖에 없는 하니가 K팝 아이돌로 데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기에 ‘귀여운 실수’라며 오히려 좋아한다.

서툰 솜씨로 대충 그린 듯한 이미지도 ‘친근하다’며 인기다. 일본 일러스트레이터 가와이소니의 대표 캐릭터 ‘빤쮸토끼’는 서울 여의도 더현대 백화점과 명동에서 팝업스토어를 진행했다. ‘왼그기그(왼손으로 그린 기린 그림)’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시빈 작가는 삐뚤빼뚤 어설프게 그린 그림으로 큰 팬덤을 확보했다.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콘테스트를 열었을 땐 334명이 참가할 정도로 호응이 컸다.

이시빈 작가의 ‘왼그기그(왼손으로 그린 기린 그림)’. /인터넷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어서

사실 ‘무해력 최강자’는 아기다. 무해력의 세 요소인 작음, 귀여움, 순수함을 모두 가진 존재.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유튜버 중 하나인 ‘태요미’ 윤태하는 2021년생 만 4세다. 팬들이 “인생 2회 차를 사는 거냐” 의심할 만큼 여유롭고 또래보다 언어 구사 능력이 월등하다. 인스타그램 팔로어 102만명, 유튜브 구독자 91만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랑스러운 태하를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는 랜선 이모들 댓글이 이어진다.

아기들에게 귀여움은 생존 무기다. 귀여울수록 보살핌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에 그렇게 진화했다는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정신과와 미국 국립아동보건·인간개발연구소 공동 연구진은 아기들이 가진 외모와 피부 감촉, 목소리 등이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진은 “아기의 외모나 행동을 보면서 ‘귀엽다’고 느끼는 감정은 방어 능력이 없는 아이 스스로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게 한 최고의 무기”라고 분석했다. 강아지나 새끼 고양이를 볼 때도 아기를 볼 때와 비슷한 뇌 부위가 자극된다고 한다.

일본 일러스트레이터 가와이소니의 ‘빤쮸토끼’. /인터넷

부산외대 권유리야 교수는 귀여움에는 강자가 약자에게 느끼는 ‘권력 감정’이 깃들어 있다고 설명한다. 작고 귀여운 대상을 볼 때 우월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행복감을 느끼게 되고, 이들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안도감에서 그 애정이 나온다는 것. 무해력의 부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무해한 물건을 소유하거나 애호하는 일은, 일상에서 ‘어떤 대상보다 내가 우월하다’는 안도감을 확인하는 가장 손쉬운 방편”이라며 “나를 둘러싼 환경이 만만치 않을 때, 그래서 스트레스가 커질 때, 본능적인 반작용으로 무해한 존재를 찾는 것”이라고 했다. 바꿔 말해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