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신 잔에 코를 박고 있는 남자 넷. 누구 하나 눈을 안 마주친다. 코와 혀로만 대화 중이다.

“사과 식초 같네요.” “붉은 과육 향도 올라오는데요.” 처음 만났지만, 병 하나 앞에 두고 말이 통했다. 취향 하나로 낯선 얼굴들이 가까워진다.

요즘 이런 자리가 늘고 있다. 위스키든 와인이든, 각자 병을 하나씩 들고 모이는 BYOB(Bring Your Own Bottle). 요즘 파티나 모임에서 흔히 쓰는 말이지만, 뿌리는 오래됐다. Bottle(병) 대신 Booze(술)나 Beer(맥주)를 지칭하기도 한다.

위스키든 와인이든 각자 병을 하나씩 들고 모이는 BYOB(Bring Your Own Bottle) 현장 모습. /김지호 기자

1910년대 미국 남부에선 술은 못 팔아도 마실 순 있었고, 손님은 병을 들고 다녔다. 금주법 시대를 거치며 ‘BYOL(Bring Your Own Liquor)’, ‘BYOB(Bring Your Own Booze)’ 같은 표현이 퍼졌고, 1950년대쯤 지금처럼 각자 술을 챙겨오는 문화로 굳어졌다.

BYOB는 한국에서도 병을 맛보고 향을 나누며 이야기를 섞는 자리가 됐다. 취향 발표회이자 성격 테스트, 가끔은 조용한 기 싸움. 모임이 잦아지면 공기도 살짝 달라진다. 누군가는 혼자 과음하고, 어떤 병은 맛도 못 본 채 사라진다. 술은 많은데 여유는 없고, 취향은 넘치는데 배려는 드물다.

BYOB에도 기본은 있다. 대단한 룰은 아니고, 그냥 같이 마실 때 지켜야 할 상식 말이다. 빈손으로 오는 사람도 있다. 술이 없어도 손 하나쯤은 채워오는 게 예의다. 술이 없어도 마음까지 비우진 말자. 가장 곤란한 건 혼자 마시다 뻗는 경우다. 어떤 병을 들고 왔든, 컨디션은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병보다 먼저 챙겨야 할 건 태도일지도 모른다.

사실 어렵지 않다. 자기 병은 간단히 소개하고, 한 잔씩 나눠 마시면 된다. 보통 첫 잔은 15~20mL면 충분하다. 남의 병을 따르기 전엔 한마디 묻는 게 기본. 내 술이 소중하면, 남의 술도 그렇다.

술맛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말투 하나에 분위기가 달라진다. 평가야 자유지만, 가져온 사람에게는 그 병이 소중할 수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을 명심하자.

한 바퀴 돌고 나면, 가장 좋았던 병을 한두 개 골라 앵콜한다. 모두가 고른 술을 한 잔 더 나누는 순간, 분위기는 무르익는다. 이후엔 자유롭게 마셔도 되지만, 주량은 넘지 말자. 혀가 무뎌졌다면 멈출 때다.

BYOB에서 진짜 중요한 건 병이 아니라 사람이다. 무슨 술을 들고 왔느냐보다, 어떻게 마셨느냐가 기억에 남는다. 술을 나누면 취향이 보이고, 취향을 나누면 사람이 보인다. 비싼 병이라면 아낌없이 따는 게 제맛이고, 흔한 병이라도 잘 소개하면 분위기를 살린다. 애호가라면 누구나 안다. 술의 품격은 병값이 아니라 나눔에서 나온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