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 밴스 미국 부통령이 착용한 아일랜드 상징 섐록 무늬 양말. /인터넷

“이 양말 마음에 드는데? 도대체 뭐지? 집중하려고 해도 양말이 너무 인상적이잖아.” 지난달 12일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미할 마틴 아일랜드 총리의 정상회담. “인플레이션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던 트럼프 대통령이 돌연 JD 밴스 부통령에게 시선을 돌려 이렇게 말했다. 집무실 곳곳에서 폭소가 터졌다.

이날 밴스는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섐록(세잎 클로버) 무늬 양말을 착용했다. ‘양말 외교’의 일환이라며 “미국과 아일랜드의 관계를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아일랜드의 대미 무역 흑자에 불만을 토로하며 경직될 수도 있던 회담장 분위기는 그 양말 덕분에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됐다.

양말이 넥타이를 대신해 남자의 개성을 드러내거나 옷차림에 유머를 더하는 소품으로 부상했다. 정치인들은 메시지나 신념을 드러내거나, 어색함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아이스브레이커(icebreaker)로 양말을 활용한다. 패션 컨설턴트 이헌씨는 “남자들이 정장을 점점 덜 입고, 입더라도 넥타이를 매지 않으면서 과거에 넥타이가 하던 역할이 양말로 내려갔다”고 말했다.

JD 밴드 미국 부통령이 자신의 양말을 보여주고 있다. /인터넷

◇넥타이 역할 대체한 양말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지난달 일본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의 회담에서 노란색 양말을 신었다. 일본 왕실 문장인 노란 국화 모양을 고려한 친밀감을 표현하려 했다는 분석이다. 헤그세스는 미국 성조기 디자인이나 색깔(빨강·파랑·하양)의 양말로 애국심을 드러냈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재한 백악관 회의에는 빨강·하양 줄무늬 양말과 푸른 바탕에 흰 별이 새겨진 양말을 각각 신었다.

이시바 시게로 일본 총리와 회담에 노란색 양말을 신은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위)과 헤그세스 장관의 성조기 무늬 양말. /인터넷

2023년 주요 7개국(G7) 히로시마 정상회의에 참석한 리시 수낙 전 영국 총리도 양말 외교를 선보였다. 그는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총리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 양말 괜찮죠?”라며 바짓단을 들어 보였다. ‘카프(Carp)’라고 자수로 새겨진 빨간색 양말. 기시다 총리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자수는 일본 프로야구단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로고이고, 빨간색은 카프 구단의 이미지 컬러. 히로시마가 고향이자 지역구인 기시다 총리는 카프의 열혈 팬으로 유명하다. 영국 PA통신은 수낙 총리의 패션이 “심사 숙고한 외교”라고 했다. 이날 두 정상은 ‘영국·일본의 글로벌 전략적 파트너십에 관한 히로시마 합의’를 발표하고 국방·무역·투자·과학기술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리시 수낙 전 영국 총리가 신은 일본 프로야구 '히로시마 도요 카프' 양말을 보고 즐거워하는 기시다 후미오 전 일 총리. /인터넷

쥐스탱 트뤼도 전 캐나다 총리는 다양한 무늬와 색상의 양말로 기존 정치인과 차별화하는 데 능했다. 캐나다의 상징인 단풍잎은 물론이고 TPO(때·장소·상황)에 맞춰 양말을 신었다. 2017년 5월 4일 아일랜드 총리와 정상회담에는 영화 ‘스타워즈’ 캐릭터 R2D2와 C3PO가 그려진 짝짝이 양말로 화제가 됐다. 스타워즈 팬들에게 5월 4일은 ‘스타워즈의 날’로 불린다. 영화 속 명대사 “메이 더 포스 비 위드 유(May the Force be with you)’의 앞부분이 5월 4일의 영어 표현 “May the Fourth(메이 더 포스)”와 비슷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쥐스탱 트뤼도 전 캐나다 총리의 단풍잎 무늬 양말(위)과 스타워즈 캐릭터 양말. /인터넷

양말 정치의 최고수는 고(故) 조지 HW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이었다. “나는 ‘양말맨’이다. 양말이 요란하고 밝고 무늬가 희한할수록 환영한다”고 자주 말했던 그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자신을 예방했을 때 클린턴의 얼굴이 그려진 양말을, NFL(미 프로 풋볼) 휴스턴 텍선스 코치와 만날 때는 팀 로고가 새겨진 양말을 착용했다. 2018년 4월 부인 바버라 여사의 장례식에는 바버라가 문맹 퇴치 운동에 힘쓴 것을 기리기 위해 알록달록한 책이 그려진 양말을 신었다.

그해 11월 타계한 부시 대통령은 회색 바탕에 전투기가 그려진 양말을 신고 관 속에 누웠다. 짐 맥그래스 대변인은 “2차 대전 당시 18세에 미 해군 조종사로 활약한 대통령의 헌신에 찬사를 바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화려한 양말을 즐겨 신었던 조지 H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전투기가 그려진 양말(아래)을 신고 관 속에 누웠다. /인터넷

◇구멍 난 양말로 ‘가난 코스프레’

국내 정치에서 화려한 양말이 화제가 된 적은 없다. 구멍 난 양말로 자신을 어필한 정치인은 있다. 김남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구멍 난 양말로 ‘궁핍’을 강조하며 개그를 섞어 홍보 소재로 활용했다. 그는 “매일 라면만 먹고, 구멍 난 양말과 운동화를 신는다”고 한 유튜브 채널에서 말했지만, 거액의 코인을 보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난 코스프레’라는 비난을 받았다.

지난 8일 대권 도전을 선언한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구멍 난 양말을 청년 표심 사로잡기에 활용했다. 2023년 경기 양주에서 열린 ‘수도권 청년들의 미래를 위한 토크 콘서트’에서 그에게 한 청년 당원이 “어제 기사 사진에 구멍 난 양말 신은 모습을 봤다”며 새 양말을 선물했다.

안 의원은 “제대로 잘 신겠다”며 신고 있는 양말의 해진 바닥 부분을 들어 보였다. 너덜너덜했다. 그는 “물건, 음식을 정말 아끼는데 양말은 구멍 나기 직전인 게 많다”며 “없이 지내는 사람들도 있는데 물건을 아껴야 하고, 그렇게 모으고 모아 1500억원을 기부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