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작사부작.’ 목요일인 지난달 27일 밤 영화관. 스크린에서는 멜로 영화 ‘비긴 어게인’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상영관에서 너나없이 사부작사부작 분주히 움직이는 신체 부위가 있었으니, 바로 손이다.
팝콘이나 버터구이 오징어 집어 먹냐고? 글쎄, 그런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대부분은 팝콘 대신 바늘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끝이 뭉툭한 ‘뜨개 바늘’. 앞사람도, 옆사람도, 뒷사람도 좌석 전체가 뜨개질을 하며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뜨개 상영회’였다.
뜨개질로 대동단결! 영화관에서 집단 뜨개질을 하고, ‘뜨개 카페’로 실을 감으러 가고, 지방에서 서울로 뜨개 상경 투어를 한다. 가깝게는 일본, 멀게는 유럽까지 해외 원정도 마다하지 않는다. 뜨개는 한때 ‘어르신 취미’로 여겨졌지만, 최근엔 뜨개에 빠진 20~30대가 늘며 취미를 즐기는 양상도 다양해지고 있다. 일명 ‘니팅힙’ 열풍. 이들은 “손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말한다. 과연 그 이유뿐일까. 잠시 ‘뜨개인’(人) 사이에 섞여 그 매력을 파헤쳤다.
◇영화관서 발 뻗고 뜨개질
“뜨개 맛집 영화관.” 서울 CGV 강변점은 지난 1월 23일 기본 관람료만 내면 뜨개질을 하며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뜨개 상영회를 처음 열었다. 상영작은 ‘리틀 포레스트’. 도면을 볼 수 있도록 조도까지 조절했다. 단, 뜨개 용품은 직접 가져와야 한다. 젊은 직원이 “요즘 뜨개질이 유행”이라며 제안했다는데, 인공 잔디가 깔린 자연 콘셉트 상영관(씨네앤포레)과 분위기가 찰떡처럼 맞아떨어지며 히트했다. 전석 매진. “야외에서 뜨개 하는 기분” “돈이 아깝지 않다”는 후기가 쏟아졌다.
그리하여 CGV는 지난 2월부터 뜨개 상영회를 전국 10곳 내외로 확대해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시끄러운 액션이나 집중이 필요한 복잡한 스토리의 영화보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영화와 매칭한다”고. 몇 장면쯤 놓쳐도 괜찮도록 말이다. 첫 상영회 때 관람객이 모두 20~30대 여성이었다면 최근에는 ‘남성 뜨개인’과 중년 여성이 3분의 1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뜨개 상영회는 매년 12월 직접 뜬 상의를 입고 다니는 ‘어글리 스웨터 데이’가 있을 정도로 뜨개가 보편화된 해외에서 먼저 시작됐다. 작년 9월 미국 인디애나주의 한 영화관에서는 ‘밤에 뜨개질하기’(Knit at Night)라는 이름으로 ‘작은 아씨들’을 상영했고, 작년 11월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뜨개 상영회가 열렸다.
집에서 발 뻗고 영화 보며 뜨개질하면 편할 텐데, 뭐 하러 영화관까지 가는 걸까. “집단 몰입이 주는 즐거움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CGV 관계자는 “OTT 등의 플랫폼을 두고 구태여 영화관에 오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좋아하고 보고 싶은 영화를 타인과 공유하기 위해서일 것”이라며 “뜨개 상영회도 그런 취향 공동체를 겨냥해 기획했다”고 말했다. 참, CGV 뜨개 상영회의 특징 중 하나는 푹신한 빈백·카바나석 등이 있는 곳에서 열린다는 점. 영화관에서도 발 뻗고 뜨개질하는 셈이다.
◇사랑방 된 ‘뜨개 카페’
뜨개인의, 뜨개인에 의한, 뜨개인을 위한 공간은 늘어가고 있다. ‘뜨개 카페’가 대표적. 매장에서 실과 바늘, 음료 등을 구매한 뒤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뜨개질을 할 수 있다. “일반 카페와 달리 오래 앉아 있어도 눈치를 주지 않아 좋다”고.
지난 7일 오후 2시쯤 서울 연희동에 있는 뜨개 상점 겸 카페 ‘바늘이야기’는 뜨개 용품을 고르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40~50명 중 중년 여성은 두어 명, 20·30대가 대부분이었다. 한 여성이 길이 20cm짜리 뜨개 바늘과 ‘피그먼트울’이라 적힌 실뭉치를 집어 계산하더니 좌석이 마련된 2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능숙하게 포장을 뜯어 바늘에 실을 감고 뜨개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과거 중년 여성들이 시장 골목 ‘뜨개방’에 삼삼오오 모여 실을 꿰었다면 지금은 뜨개 카페가 그 역할을 한다. 이날 카페에서는 뜨개 모임 ‘레뜨고’ 회원 5명이 둘러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한 달에 1~2번 있는 ‘정기 함뜨(함께 뜨개질)’ 날이라고. 모임장인 닉네임 ‘이뵹뵹’(32)씨는 “원래는 친구 4~5명과 알음알음 만나 뜨개질하던 작은 모임이었다”며 “지난해부터 뜨개 인기가 하늘을 찌르더니 친구의 친구, 친구의 친구의 친구로 소개가 이어져 어느새 내 또래 50명이 모인 소대 규모가 됐다”고 했다.
젊은 층에서 뜨개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큰돈 들이지 않고도 집에서 유튜브로 쉽게 배울 수 있는 취미이기 때문이라고 뜨개인들은 말한다. 구독자 43만명의 유튜버 ‘김대리’는 “똥손(?)도 뜰 수 있을 만큼 쉽게 알려준다”는 소문이 나며 인기. 전체 영상 누적 조회 수가 9100만회에 이른다.
테이블에 ‘얀홀더’(실패꽂이)를 두고 카디건을 뜨던 프리랜서 김민정(29)씨 역시 유튜브 영상을 보고 뜨개질에 입문했다. 현재 입고 있는 니트도 한 달에 걸쳐 직접 떴다는 그는 “세상에는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 많다”면서 “뜨개질은 시간과 공을 들인 만큼 반드시 결과로 돌아온다는 점이 매력”이라고 했다.
◇뜨개 문화 배우러 유럽행
“서울 상경 투어 다녀왔어요~.” 강릉에 사는 윤정민(30)씨는 틈틈이 ‘서울 뜨개 투어’ 원정기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다. 닉네임도 ‘뜨개에 미쳤다’는 뜻인 ‘뜨치광이’. 동대문 종합시장에서 부자재를 사고, ‘바늘이야기’ ‘솜솜뜨개’ ‘열매달 이틀’ 같은 유명 뜨개 매장을 돌며 마음에 드는 실을 고른다고 한다. 윤씨는 “KTX 비용을 포함해 교통비만 5만원 정도 들지만 뜨개실은 실제 색과 촉감이 중요하기 때문에 멀리 가서 직접 고를 가치가 있다”고 했다.
서울 투어는 양반이다. 해외도 간다. 특히 가까우면서도 ‘뜨개 거리’ 등이 있는 도쿄·후쿠오카 등이 인기 행선지. 직장인 김나정(32)씨는 지난해 가을 도쿄로 5박 6일 ‘뜨개 원정’을 떠났다. 대형 공예 전문점인 ‘오카다야 신주쿠’, 여러 체인점을 두고 있는 ‘유자와야’ 등 유명한 뜨개 매장 6곳을 돌았다. 김씨는 “한국에 수입되지 않거나 희귀한 브랜드의 실 등을 캐리어 한가득 사 왔다”고 했다.
재력이 되는(?) 이들은 유럽으로 떠난다. 한국에 비해 뜨개 취미가 생활화된 유럽 등지에서는 뜨개 기법을 배우며 여행하는 ‘니팅 리트리트’(knitting retreat) 프로그램이 활성화돼 있다. 4박 5일간 먹고 자며 뜨개 투어를 하는 식이다. 작년 6월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로 단체 뜨개 투어를 다녀온 50대 주부 박도연씨는 “현지 뜨개인들과 교류하면서 독특한 뜨개 문화를 체험한 게 값진 추억으로 남았다”고 했다.
이들은 “뜨개를 통해 보이지 않는 안정감과 소속감, 유대감을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대학생 장나연(25)씨는 “혼자 뜨개를 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일면식도 없는 옆 사람에게 물어보는데 거절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했다. “뜨개질은 기본적으로 혼자 하는 작업이지만 같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위안이 있어요. 같은 실을 붙들고 있다는, ‘연결된 고독’ 같은 느낌.” 바늘은 실을 엮고, 실은 사람을 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