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올해 나이 90세, 배우 이순재. 우리는 그를 ‘국민 아버지’라는 따뜻한 호칭으로 부릅니다. 영화, 드라마, 연예 프로그램까지 그 친근한 얼굴을 마주할 기회는 언제든 있었지만, 이순재 배우가 조금 더 특별했던 건 연극 무대에서였지요.

그가 연극에 쏟은 애정은 특별합니다. 서울대 철학과 재학 시절에 연극반 활동으로 연기를 시작한 이후 드라마와 영화에서의 성공에도 언제나 무대를 잊지 않았죠. 아버지들의 퇴근길도 재촉했다는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공전의 히트를 칠 때 ‘대발이 아버지’를 보며 저런 고약한 아버지가 있을까 싶었는데 훗날 무대에서 가깝게 뵐 줄은 몰랐습니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의 배우 이순재. 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연기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처절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컴퍼니그리다

2012년 동숭아트센터. ‘세일즈맨의 죽음’을 번안한 연극 ‘아버지’를 보기 위해 객석 맨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은 우리나라에 소개된 번역 희곡 중 많이 알려지고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죠. 세계 언제, 어디서나 늘 아버지의 삶은 고달프기 마련인지 공감을 얻으며 오랫동안 살아 숨 쉬는 연극입니다.

아버지 역을 연기하는 이순재 배우가 집을 나섭니다. 오늘은 또 어디로 가서 가족을 부양할 벌이를 해야 될까, 느릿느릿 발걸음을 떼던 그가 얼굴을 들자 눈 언저리가 붉게 번져 있었죠. 멀리서 보는지라 처음에는 다음 장면을 위한 분장인가 했는데, 당황스러워하는 상대 여배우의 기색을 보니 부상을 당하셨구나 싶었습니다. 암전된 무대에서 철제 기둥을 돌아 걸어 나오시다가 부딪히셨구나. 하지만 이순재 배우는 동요하지 않고 자신이 맡은 분량의 대사를 모두 하고 다음 막을 위한 암전까지 자리를 지키시더군요.

간단한 응급처치로 반창고만 붙인 채 공연을 끝낸 이순재 배우가 커튼콜을 받아 관객 앞에 섰습니다. 관객들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모두 큰 부상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실려 있는 듯했지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멀리서 이순재 배우를 보면서도 이런 부상으로 공연을 그만둘 분이 아니라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무대는 관객과의 약속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셨었으니까요.

연극 '라이프 인 더 씨어터'는 주로 분장실에서 사건이 펼쳐진다. 왼쪽이 배우 이순재, 오른쪽은 홍경인. /연극열전

2008년 연극열전2에서 연극 ‘라이프 인 더 씨어터’ 홍보 담당자로 이순재 배우를 만났습니다. ‘세상은 무대, 우리는 배우, 인생은 연극’이라는 카피처럼 작은 소극장 안에서 벌어지는 연극배우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었어요. 인생의 내리막길에 당도한 베테랑 배우 로버트 역은 이순재 배우가, 떠오르는 신인 배우 존 역은 홍경인 배우가 연기했죠. 석 달 가까이 이어지는 긴 공연 일정과 2인극으로 무대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 부담감이 만만치 않은 무대였습니다.

어느새 20년이 가까워지는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도 이순재 배우를 보면 떠오르는 건, 연습 시간에 한 번도 늦는 법 없이 가장 먼저 도착해서 대본을 암기하고 연기 디테일을 고민하는 노배우의 성실함입니다. 공연을 앞두고 기자와 만난 인터뷰 자리에서 ‘암기의 비결’을 묻자 그 자리에서 역대 미국 대통령 40여 명의 이름을 외워 보이며, ‘이 정도쯤이야’라는 듯 미소 짓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이 연극은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공연을 10여 일 앞둔 2008년 7월 30일 오전, 이순재 배우의 모친상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연일 이어지는 매진으로 오후 8시 공연은 물론이고 그날은 특별히 오후 4시 공연까지 추가돼 무대가 2회 예정되어 있는 날이었지요. 갑작스러운 비보와 환불 절차 준비에 마음이 급해졌죠. 그런데 사무실로 이순재 배우의 전화 한 통이 걸려왔어요. “오늘 예정된 무대는 취소하지 마세요. 무대는 관객과의 약속이니 예외는 없습니다.” 그날 무대에 올라 젊은 후배 존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고 쓸쓸히 퇴장하는 로버트를 연기하는 이순재 배우를 바라보며 저는 연극을, 또 인생을 대하는 자세를 배웠습니다. 그 어떤 말이 더 필요할까요?

배우 이순재가 '2024 KBS 연기 대상'에서 대상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그는 지난 15일 KBS 별관 공개홀에서 열린 ‘제37회 한국PD대상 시상식’의 배우 부문 수상자였으나 건강 문제로 참석하지 못했다. /KBS

2016년, 이순재 배우 연기 인생 60년 기념작 ‘세일즈맨의 죽음’을 보기 위해 다시 극장을 찾았습니다. 배우로서 처음으로 돈을 받고 연극 무대에 오른 작품이 ‘세일즈맨의 죽음’이었고, 소위 대박이 나서 꽤 큰돈을 벌었다고 추억하신 작품이죠. 세일즈맨으로 평생을 바쳐 일했지만 젊은 사장에게 쫓겨나듯 회사를 나와야 하는 수치심, 믿었던 큰아들마저도 자리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걸 보며 아버지로서 느끼는 죄책감. 그의 어깨에는 아버지로서, 또 노배우로서 살아낸 삶이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지난겨울, 건강 악화로 약속된 연극 일정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에 걱정이 되었는데, 방송사 연기대상에서 최고령 수상자로 무대에 오르셨더군요. 울먹이는 수상 소감에 콧등이 찡해지고 말았습니다. “평생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문득 안부가 궁금해졌습니다. 건강히 무대로 다시 돌아오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