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선베드에서 눈을 떴다. 더운 바람이 머리 위 야자잎을 천천히 흔들었다. 피부에 닿는 햇살은 따갑지 않았다. 원한다면 언제든 바다에 뛰어들고, 열대 과일로 입안을 적시다 낮잠에 빠져도 괜찮은 완벽한 이국(異國). 태국 남쪽 섬의 나른한 한낮 풍경 속, 좋아하는 여름 노래가 귓가에 맴돌았다. “저 태양에 이 계절을 가두어 줘/ 조금만 더, 이렇게 머물고 싶어….”
적도를 향해 길게 뻗은 말레이반도가 감싼 타이만(灣)에 코사무이가 있다. 인천에서 방콕 수완나품 공항까지 6시간,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다시 한 시간. 온몸이 찌뿌둥해질 때쯤 열대의 섬에 도착한다. 푸켓에 이어 태국에서 둘째로 크면서 제주도의 9분의 1 정도인 아기자기한 휴양 섬. 리조트로 향하는 차 안에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감탄하자 운전석에서 자랑 섞인 답이 돌아왔다.
“사무이는 연중 이런 날씨예요. 가끔 비가 와도 곧 화창해져요. 매일 떠오르는 아름다운 태양에 감사할 수 있지요.”
◇타이만이 품은 여행자의 안식처
코사무이는 세상이 모르던 섬이었다. 중국의 지도에 등장해 세상에 알려진 것이 17세기. 그렇지만 이미 6세기쯤 중국 남부에서 온 어부들이 코코넛 향기에 홀려 정착해 있었다. 어부들은 아래층에는 상점, 위층에 가정집이 들어선 화교식 주상 복합 ‘숍 하우스(shop house)’를 짓고 마을을 꾸렸다. 시가를 입에 문 프랑스 배낭여행자들이 이 마을에 찾아와 숙박비를 낸 해프닝이 오늘날 코사무이의 고급 리조트 사업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앞에 붙은 ‘코(koh)’는 태국어로 섬을 뜻한다. ‘사무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섬에 자라는 나무 ‘무이(mui)’에서 따왔다는 설도, ‘안전한 곳’을 뜻하는 말레이어 ‘사보이(saboey)’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섬이 품은 안락한 자연을 담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여기는 구전이 더 익숙한 섬. 한 가지 답만을 내놔야 하는 도시인의 생활 습관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아난타라 라와나 리조트에 들어서기 전에 반드시 징을 세 번 울려야 한단다. ‘뎅, 뎅, 뎅.…’ 각각 즐거움, 건강, 행운을 빈다는 의미다. 페퍼민트 티에 적신 수건으로 땀을 훔치고 연꽃차로 몸을 식히며 태국을 상징한다는 릴리와디(플루메리아), 샛노란 라차프륵 꽃이 만발한 정원 사이로 걸었다. 양옆으로 전통 가옥 양식의 빌라가 펼쳐지자 작은 마을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한계 없이 자유롭게 뻗어 자라는 나무, 알록달록 열대의 꽃에 조심스럽게 손을 갖다 대니 차가운 물기가 느껴졌다. 비로소 다른 세계로 왔다는 실감이 났다.
◇바다와 수풀에서 상쾌한 재충전
오전 6시, 하나둘 하나둘 구호와 함께 노를 저으며 차웽(Chaweng) 비치를 벗어났다. 카약은 정직해서 조금만 힘을 풀어도 항로에서 벗어났다. 서툰 선원들을 향해 가이드가 외쳤다. “노를 무작정 빠르게 젓는다고 배도 빠르게 가는 게 아니에요. 힘 빼고 천천히, 팔을 크게 움직이며 저어봐요!” 안내대로 팔을 크게 움직이며 천천히 노를 젓자 비로소 배가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바다와 호흡하는 기분. 난생처음, 직접 운전한 작은 배 위에서 떠오르는 해를 봤다.
코사무이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관광 사업은 섬에 공항이 열린 1989년쯤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후발 주자인 덕분에 다른 관광지에 비해 깨끗한 자연이 보존돼 있다.
수풀을 헤치고 스파를 찾아가면 태국의 ‘화타’들이 반긴다. 초록빛 자연이 눈을 가득 채우는 통창을 앞에 두고 환복하려니 조금 민망했지만 그것도 잠시. 인도에서 온 스크럽, 시원한 민트, 달콤한 코코넛 오일의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뜨겁게 달군 대나무나 세러피스트의 ‘약손’이 지나는 곳에서는 행복한 고통이 느껴졌다. 현세의 때를 모조리 벗겨내고 새사람이 되는 듯한 기분이.
그래도 몸과 마음이 답답하다면 더 먼 길을 떠나는 것도 방법이다. 코사무이 선착장에서 쾌속선을 타고 북쪽으로 50분을 달리면 코팡안(Koh Phangan)에 있는 아난타라 라사난다 코팡안 빌라에 닿는다. 코팡안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데 차로 50분이면 충분한 작은 섬이라 어딜 가나 바다가 보여, “섬에 있다”는 감각이 더 자주 느껴진다.
‘모래톱(ngan)’이라는 단어가 이름에도 들어간 섬 코팡안에는 물이 얕은 해변이 많아 바다 수영에 입문하기 좋다. 스노클링 성지로 알려진 매하드(Mae Haad) 해변에서는 근처 섬으로 이어진 모래톱을 따라 산책도 할 수 있다. 맨발로 모래를 꾹꾹 밟으며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를 보니 온몸에 상쾌한 바람이 통하는 것만 같았다.
◇입안 가득 남부 아시아
코사무이 음식에는 남부 아시아 섬의 지리적 특성이 반영돼, 먹는 순간 머릿속에 지도가 펼쳐진다. 남인도에서 온 마살라 향을 은은하게 느끼는 사이 치고 올라오는 열대의 과일 맛이 ‘킥’. 식사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맛있게 매콤한 맛은 중국 남부 하이난·윈난성 일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어떤 음식에나 들어가 있는 코사무이산 코코넛 밀크는 혀에 가벼운 여운을 남긴다.
섬인 만큼 식탁의 주인공은 해산물이다. 새벽의 바다에서 잡아 왔다는 조개와 새우에서는 맑고 투명한 바다의 맛이 느껴졌다. 코코넛 과즙에 마라 소스를 섞어 버무린 삶은 랍스터 요리는 지나치게 달큰하지도 얼얼하지도 않고 기분 좋은 균형감이 있었다. 남쪽 바다의 해산물과 코코넛, 그야말로 코사무이가 입안에 있었다.
모래의 열기가 가라앉은 저녁에는 120년 된 거대한 나무 옆에 지어진 트리톱스(Treetops) 시그니처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촌깨오(건배)”를 외치며 와인 잔을 부딪쳤다. 일몰을 함께할 파인 다이닝 코스 이름은 ‘대지와 바다의 잔향’. 마을의 수호신 같은 나무 곁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며 작명 센스에 감탄했다.
코사무이가 속한 수라타니 해역에서 온 홍합에 그라탱과 캐비아를 올린 호화로운 애피타이저로 시작. 태국의 맛이 곁들여진 타이거새우, 바다 생선 등 해물을 활용한 요리와 부드러운 설로인 등 요리마다 셰프가 추천하는 와인이 곁들여졌다. 입안을 정리해 주는 카피르라임 소르베와 따뜻한 차로 피니시. 정성과 진미에 감탄해 자꾸만 ‘못깨오(잔을 비우다)’해서는 안 된다. 여행자에게는 하루 한 시간이 아쉬운 법이니까.
태국이라고 꼭 태국 음식만을 맛봐야 할 의무는 없다. 코사무이는 ‘태국의 시칠리아’라는 명성 덕에 세계 각지 여행객이 많이 찾는 곳. 삼바에 어울릴 음악이 흘러나오는 남미 음식점 ‘길티(Guilty)’에서는 게살 크로켓, 새우 라이스 페이퍼 튀김처럼 익숙한 음식을 만날 수 있다. 눈앞에서 칵테일과 과카몰리를 만들어 주는 작은 쇼에 환호하는 것도 큰 재미. 그나저나 불교 국가의 음식점 상호가 ‘죄책감’이라니, 죄책감을 벗어던지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로 하고 입안 가득 코사무이를 즐겼다.
◇최후의 순간까지 만끽하는 여유
코사무이는 마지막까지 발걸음을 붙잡았다. ‘가장 아름다운 공항’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는 사무이 공항이 섬의 마지막 비기(秘技). 사무이 공항은 바람 통할 곳이 많은 목조 건축물이라 마치 리조트 같다. 체크인을 마치고 게이트까지 향하는 길도 야외로, 시원한 음료와 스파용품을 판매하는 아기자기한 상점가가 펼쳐졌다. 여행지를 떠나는 날 공항에 도착하면 괜히 발길을 재촉하게 되는데, 사무이 공항은 달랐다. 조급해하지 말고 끝까지 여유를 즐기라고 다독이는 듯했다.
섬을 여행하고 나면 떠날 때 아쉬움이 더 크다. 땅으로 이어져 있지 않기 때문일까, 떠난 뒤 돌아보면 꿈처럼 섬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그러나 서울의 빌딩 숲으로 돌아와서야 깨달았다. 손에 닿지 않는 섬은, 그곳에서의 기억과 함께 영원히 여름의 섬으로 마음속에 남는다는 것을. 코사무이의 투명한 바다와 맑은 하늘을 떠올리면 언제고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