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개발 중인 코로나 백신은 200종이 넘는다. 이 가운데 임상 시험 최종 단계인 3상을 통과하거나 임박한 백신은 화이자, 모더나 백신 둘뿐이다. 이 백신을 우리 정부는 여태 단 한 건도 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안전성 검증이 끝나지 않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경우도 주요 선진국은 올여름 이전부터 선구매 경쟁을 벌였지만 우리 정부는 지난달 말에야 계약했다. 베트남·태국 같은 동남아 국가들보다 늦었다. 한때 ‘방역 모범국’으로 칭송받던 한국이 ‘백신 후진국’으로 전락한 것은 네 가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①”코로나 확산세 잡을 수 있다” 판단 미스
정부는 지난 8일에야 4400만명분 백신 도입 계획을 밝혔다. 늦어진 이유에 대해 “꼼꼼한 절차를 거치는 과정” “쉽게 하려면 올 7월에 이미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지난 6월부터 전담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선구매 협상을 준비했지만 안전하고 효과 좋은 백신 도입을 위해 신중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달리기처럼 1등 구매가 목표 아니다”고도 했다.
정부는 지난달 초까지만 해도 백신 확보를 서둘지 않아도 사회적 거리 두기 등 방역 대책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선구매 물량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와도 “우리는 확진자가 외국보다 현저히 적다” “우리는 여건이 다르다”고 했다. ‘K방역' 성공에 취해 겨울철 대유행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다 백신 도입 시기마저 놓친 것이다.
②업계·전문가들의 “선구매” 권고 무시
방역 전문가들은 올봄부터 정부에 “백신 확보를 서둘러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정부는 무시했다. 제약업계에서도 선진국들의 백신 쟁탈전 동향을 정부에 전달했지만 정부에선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세계 각국 움직임을 정부에 전했지만 공무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고 했다. 정부가 전문가와 업계 권고를 무시한 것은 외국 백신 도입보다 국산 백신·치료제 개발에 더 관심을 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아직 국산은 1상을 통과한 백신도 없다. 이런 와중에 지난 7월 아스트라제네카와 SK바이오사이언스는 국내 위탁 생산에 합의했다. 정부가 백신 하나는 확보한 것으로 보고 화이자 등 다른 백신 확보를 게을리 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③”선입금 떼일까” 돈 아끼려다 실기
복지부 안팎에서는 재정 당국이 선입금을 떼일 수 있는 구매 계약에 난색을 표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선입금은 계약금 성격으로 해당 제약사가 백신 개발에 실패하더라도 돌려받을 수 없는 돈이다. 선입금 액수는 제약사와 협상에 달려 있지만 정부가 다국가 연합 백신 공급 기구인 코백스 퍼실리티에 납부한 선납금 액수(850억원)에서 보듯, 최소 수백억원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백신 확보를 서둘지 않겠다는 정부 입장은 지난달 12일 180도 달라졌다. “선입금 전체를 포기하더라도 되도록 다양하게, 충분한 양을 확보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화이자, 모더나 백신을 언제, 얼마나 들여올 수 있을지 정부는 한 달 넘도록 뾰족한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④”징계 우려” 공무원 몸 사리기
정부 고위 관료 출신의 한 전문가는 “백신 선구매가 늦어진 것은 복지부 공무원들이 사후 감사 등에 대비해 적극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동안 대규모 감염병 파동이 지나가면 보건 당국의 대응을 놓고 감사원 감사, 국회 국정감사 등에 시달렸기 때문에 공무원들이 문제 생길 만한 일은 벌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9년 신종플루 유행 당시 백신 재고 처리 문제가 불거지자 감사원은 한 달에 걸쳐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집중 감사를 벌였다. 실제로 징계를 받은 공무원은 없었지만 “이때 생긴 트라우마(정신적 충격)로 공무원들이 몸을 사렸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당시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신종플루 백신을 2400억원 들여 수입했는데 750억원가량 과다한 재고가 남았다”는 지적이 나와 공무원들을 압박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