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아까워요. 11명 맞을 양이 든 한 바이알(병)에 거의 절반쯤 남은 것도 있잖아요.”

12일 경기도 A의원 원장이 지난주부터 쌓아둔 폐기 대상 아스트라제네카(AZ) 코로나 백신 5병을 보여줬다. AZ 백신은 한 병을 열면 11명까지 맞힐 수 있지만 대신 6시간 안에 활용해야 한다. 그런데 접종 대상자가 부족해 남으면 다 버려야 한다. 어떤 날은 5회, 어떤 날은 2회분이 남곤 했다. 이렇게 남은 백신을 모아뒀다 보건소에 폐기용으로 반납한다. “한때는 서로 맞겠다고 난리였는데 지금은 여기서만 15회분이 그냥 버려지는 거예요.”

보건소 직원의 실수로 상온에 방치되어 폐기된 화이자 백신. 약 1000여 명이 맞을 수 있는 양이다. /김영근 기자

코로나 4차 대유행 불길이 거센 와중에 의료 현장에선 멀쩡한 백신이 계속 버려지고 있다. 한 사람이라도 백신을 더 맞혀야 하는 상황에서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12일 밤 11시 현재 신규 확진자는 1870명을 넘었다. 10일(2223명), 11일(1987명)에 이어 2000명 안팎 확진자가 나올 전망이다.

본지가 국회 백종헌 의원실(국민의힘)을 통해 받은 질병관리청 ‘폐기 백신 현황’에 따르면 12일 0시 현재 1613바이알, 약 1만5000회분이 폐기됐다. AZ가 대부분이고 화이자, 얀센 등도 있다. 문제는 최근 들어 이 같은 백신 폐기 현상이 가속화됐다는 점이다. 서울 강서구 B이비인후과 의원은 “이번 주 이미 2~3명분을 폐기했는데, 앞으로 백신이 더 많이 남을 것 같다”고 전했다. 경기도 C내과의원도 “어떻게든 폐기 백신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11일에도 잔여 백신 대기자를 못 찾아 결국 1회분을 버려야 했다”고 전했다.

폐기 처분되는 백신은 대부분 AZ 백신이다. 화이자·얀센도 일부 있지만 AZ가 많다. AZ는 올해 2000만회분(코백스 물량 제외)이 들어올 예정인데 드물게 나타나는 혈전증(혈소판 감소성 혈전증·TTS) 우려로 50세 이상만 접종하도록 원칙이 변경됐다. 원래는 30세 이상에게 맞힐 수 있었는데 대상이 대폭 줄었다. 그러면서 ‘백신 공급난’ 속에 AZ가 남아도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폐기 골머리

현재 다수 병·의원에서는 “AZ 잔여 백신을 폐기 처분해야 하느라 걱정이 많다”고 하소연한다. “잔여 백신을 내놔도 맞을 사람을 못 구해 폐기 처분하고 있다” “이렇게 AZ 백신이 버려질 바에는 백신이 없어서 못 맞는 나라에 줬으면 좋겠다”는 반응도 나왔다.

실제 12일 네이버나 카카오 앱을 통한 잔여 백신 예약 시스템 화면을 여니 AZ 잔여 백신이 7~10명분씩 남은 의원들이 수두룩하게 화면에 떴다. AZ 백신은 한 번 뚜껑을 따면 6시간 이내에 11명을 맞혀야 다 쓰는 것이다. 그런데 11명을 찾지 못하고 적게는 1~2명만 접종한 채 버려지는 백신도 나온다는 얘기다. 수도권 D의원에서도 오전 11시 잔여 백신이 6개 남았다고 올렸는데 결국 진료 시간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결국 남은 백신(6회분)을 폐기하기로 했다. 전국 백신 접종 위탁의료기관(동네 병·의원)은 1만4000여 곳. 1곳에서 하루 1회분만 활용하지 못해도 하루 1만4000회분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방역 당국 권고(50대 미만 접종 제한)를 무시하고 40대에게 AZ 백신을 맞혀주겠다는 의원도 있었다. 직장인 장모(45)씨는 “어차피 버릴 AZ 백신이라면, 그냥 빨리 접종해주면 안 되는지 동네 병원에 물어봤더니, ‘일단 와보시라’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잔여 백신 폐기 문제는 60~74세 미접종자 126만9000명을 대상으로 AZ 백신을 5일부터 접종을 시작하면서 본격 시작됐다. 이들을 대상으로 접종한 뒤 남은 백신은 50대 이상에게만 접종할 수 있다. 그런데 50대 연령층은 이미 지난달 26일부터 화이자·모더나 접종을 하고 있어서 굳이 AZ 백신을 선택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75세 이상도 화이자를 맞고 있다. 서울 E내과의원 원장은 “60세 이상 분들이 AZ 백신은 맞기 싫다며, 화이자 잔여 백신을 꼭 맞게 해달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난감할 때가 적잖다”고 말했다.

◇잔여 백신 활용 새 전략 나와야

잔여 백신 폐기가 증가한 데는 의료 현장을 꼼꼼히 파악하지 못하는 정부 탁상 행정도 한몫했다. 지난 6월 16일 AZ 1차 접종을 마친 박모(55)씨는 개인 사정으로 2차 접종일(9월 1일)을 앞당겨 AZ 잔여 백신을 맞으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담당 보건소에 물어보니 “방역 당국이 1차 접종자에게는 잔여 백신을 맞지 못하도록 시스템을 막아뒀다”는 답이 돌아왔다. 박씨는 “60~74세 연령층은 AZ 접종 간격을 8주로 당기고, 50대는 11~12주로 못 박아둔 것도 이상한데 버려지는 잔여 백신을 활용하겠다는 걸 못 하게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현장 의료진들은 “(AZ뿐 아니라) 화이자·모더나 같은 mRNA 백신도 잔여 백신이 나오고 폐기되느니 가능한 곳에선 접종 간격을 6주보다 앞당겨 맞힐 수 있게 예외 규정을 둬야 한다”고 말한다. 화이자·모더나 모두 원래는 접종 간격이 3~4주였다. 당국은 앞서 모더나 물량 차질이 발생하자, 4주였던 모더나·화이자 접종 간격을 6주로 일괄 조정한 바 있다. 의료진들은 “백신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있는 백신이라도 최대한 활용하려면 정부가 잔여 백신 접종 문제를 융통성 있게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델타 변이에 대한 방어 전선을 조금이라도 더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역 당국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선책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김기남 예방접종대응추진단 접종기획반장은 “50세 이상 미접종자에 대해선 동네 병·의원에서 예비 명단을 통해서도 AZ 잔여 백신을 접종할 수 있도록 기준을 이미 완화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더 적극적인 대책을 주문했다. 정기석 한림대 성심병원 교수는 “희망자에 한해 50대 아래라도 AZ 백신을 접종하는 방법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천은미 이대목동병원 교수는 “50대 AZ 백신 접종 간격을 8주 정도로 당겨 잔여 백신 수요를 늘리는 전략도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