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수도권의 한 병원에서 의료진이 수술을 하고 있다./장련성 기자

정부가 분만, 중증 외상, 심·뇌 수술, 중증 소아 관련 불가항력적 의료 사고 발생 시 국가의 보상 한도를 10억원으로 대폭 올리는 방안을 추진한다. 생명과 직결된 필수 진료에 대해선 의사의 중과실이 없는 한 환자가 중상해를 입어도 불기소하고, 사망해도 형(刑)을 감면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또 ‘의료사고심의위(가칭)’를 만들어, 이곳에서 의사의 중과실 여부 등을 먼저 판단하게 할 방침이다. 중과실 여부 판정에 따라 향후 검경의 수사 착수 및 종결이 결정될 가능성이 커 의료사고심의위가 강한 권한을 쥔 ‘의료계 재판부’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 의료개혁특위는 최근 이런 내용의 ‘의료 사고 안전망 강화 방안’을 마련해 막바지 검토 중인 것으로 20일 알려졌다.

그래픽=김현국

소송 부담 완화는 환자 생명을 살리는 필수 진료과 의사들의 가장 큰 숙원이었다. 의사가 민·형사소송에 휘말릴까 봐 소신 진료를 못 하고, 아예 필수 진료과를 기피하는 현상이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처음으로 필수 의료의 소송 부담을 크게 낮추는 종합 대책의 윤곽을 잡은 것이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정부는 분만, 중증 외상, 심·뇌 질환, 중증 소아 관련 치료를 ‘고위험 필수 진료 행위’로 분류했다. 이 네 가지에 대해선 의사 과실이 없는 불가항력적 의료 사고가 발생하면, 국가가 보상금을 최고 10억원 지원하는 특별 배상 체계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그래픽=김현국

정부는 지난해 불가항력적 분만 사고에 대해서만 국가 보상금 한도를 3000만원에서 3억원으로 올렸다. 이후 1년도 안 돼 보상금 한도를 3억원에서 10억원으로 재차 올리고, 그 대상도 분만에서 중증 외상, 심·뇌 질환, 중증 소아로 확대하는 것이다. 환자와 의사가 정부의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중재에 응했을 때만 이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

◇필수의료 사고 국가보상금 3억→10억으로 인상

정부가 마련한 의료사고 안전망 강화책의 핵심은 사고 피해 환자에겐 현실적인 보상을 하고, 필수과 의사에겐 배상 걱정 없는 소신 진료를 하게 하자는 것이다.

전반적인 환자 배상액을 높이기 위해 정부는 전체 병의원에 의료 배상을 위한 책임보험 가입을 의무화할 계획이다. 환자 생명을 다루는 필수 진료과의 보험료는 국가가 일부 지원한다. 현재 대한의사협회가 운영하는 의료 배상 공제 조합이 있긴 하지만, 가입률은 30%에 불과하다. 정부는 책임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병의원에 대해선 의료 사고 시 형사처벌 감면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정부 관계자는 “배상 속도를 높이기 위해 1000만원 미만의 소액 의료 사건에 대해선 30일 안에 배상을 완료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했다.

의료 사고 시 형사처벌 기준과 대상도 크게 바뀔 전망이다. 우리나라 의료 사고 처벌 수위는 치료 후 환자 상태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의사는 중형에 처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환자 상태(사고 결과)가 아니라, 의사의 중과실 여부(사고 원인)를 기준으로 책임을 묻는 ‘중과실 중심 기소 체제’로 처벌 시스템을 바꾼다는 뜻이다.

이에 따르면, 중과실을 저질러 의료 사고를 낸 의사는 법적 보호를 하지 않는다. 다만 정부는 중과실을 다소 엄격하게 규정할 계획이다. ‘수술 부위 착오’ ‘잘못된 수혈·투약’ ‘일회용 의료 기구 재사용’처럼 명백한 잘못을 관련 법에 중과실로 명시할 방침이다.

의사의 단순 과실이 있었을 땐, ‘필수 의료 행위’였는지 아닌지에 따라 처벌 수위가 확연히 달라진다. 의사와 환자 측이 합의했으면 환자가 사망해도 필수과 의사는 기소되지 않도록 할 방침이다. 하지만 피부·미용 등 비필수 의사는 합의가 됐다고 해도 환자가 사망하면 기소돼 법원 재판을 받아야 한다. 환자의 생사를 결정하는 긴급 수술을 많이 하는 신경외과, 흉부외과, 산과, 소아과 의사 등 필수 의사들을 보호하겠다는 얘기다.

합의가 되지 않았을 땐 차이가 더 크다. 필수 진료과 의사는 단순 과실로 환자가 중상해를 입어도 원칙적으로 불기소하도록 할 방침이다. 사망 시엔 기소는 하지만 형은 감경하거나 면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반면 단순 과실을 저지른 비필수 의사는 합의를 못 하면 환자가 경상해여도 기소된다.

정부는 이를 전담할 의료사고심의위를 신설할 방침이다. 환자가 의료 사고로 의사를 고소·고발하면 이를 접수한 검경은 30일 내로 의료사고심의위에 심의를 요청하게 할 계획이다. 그러면 심의위는 120일 내에 이 의료 행위가 법적으로 보호할 필수 의료 행위였는지, 의사의 과실은 어느 정도였는지 판정한다.

심의위가 의사의 중과실이 있었다고 판정을 내리면 검경은 수사에 착수해 기소한다. 하지만 필수과 의사의 단순 과실로 인한 사고라고 판정을 내리면 수사기관은 원칙적으로 수사를 종결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심의위는 수사·기소를 가르는 핵심 권한을 갖게 된다. 의료 분야의 전문성을 감안한 ‘의료 사고 특화 사법 체계’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심의 위원은 20명 내외로 구성하고 의사, 법조인, 환자 단체 인사를 참여시킬 예정이다. 심의위 사무국은 보건복지부에 두되, 법무부와 검찰, 경찰 인력을 파견받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정부 관계자는 “의료 소송은 1심 결과를 받을 때까지 평균 26개월이 걸린다”며 “상당수 의료 분쟁 사건은 의료사고심의위에서 4개월 안에 결론이 날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이런 내용을 담은 ‘의료 사고 형사 절차 및 처벌법(가칭)’ 등 관련 법 제정안을 올 상반기 중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정부 측은 “누가 정권을 잡든 필수 의료 법적 보호는 해결해야 할 문제”라며 “여야 간 이견이 크지 않아 법안 통과가 어렵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