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친구에게 ‘탄핵 촉구 집회에 나갔다’고 말했다가 ‘너 같은 애들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헤어졌어요.”(20대 여성 A씨)
우리 국민이 느끼는 ‘사회 갈등’ 정도가 지난해 사상 최고 수준에 달했다는 정부 연구기관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또 빈부 격차, 지역·남녀 갈등, 대·중소기업 격차 등 다양한 사회 갈등 유형 중 진보와 보수 간 갈등이 가장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더해 작년 12월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등으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면서 최근에는 정치적 견해가 달라 파혼하거나, 가족·친구와 인연을 끊는 등 갈등이 일상으로 번지고 있다.
3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4 사회통합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 갈등 정도는 지난해 3.04(4점 만점)로 2018년 관련 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6~8월 19~75세 성인 3000명을 대상으로 면담 조사한 결과다. ‘전혀 심하지 않다’는 1점, ’매우 심하다’는 4점이다. 그동안 2점 후반대에서 등락하다가 2023년부터 갈등 수치가 높아지기 시작해, 지난해 처음으로 3점대를 기록했다.
특히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에 대한 점수가 지난해 3.52점으로 여러 갈등 유형 가운데 가장 높았다. 이어 지역 간(수도권과 지방) 갈등(3.06점), 정규직과 비정규직(3.01점), 노사 갈등(2.97점), 빈부 갈등(2.96점) 등의 순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에 더해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여부 결정을 앞두고 우리 사회 정치 갈등은 더 심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탄핵 찬성이야? 반대야?“…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갈라진다
직장인 최모(29)씨는 5년째 연애 중인 여자 친구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점 때문에 결혼을 망설이고 있다. 최씨는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왔는데, 최근 들어 평생 같이 살 사람과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매일 싸우고 결국 이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남자 친구가 비상 계엄을 지지하는데 헤어지는 게 맞나” “(정치적 견해가 다른) 여자 친구를 설득하다가 엄청 싸웠다” 등의 글이 올라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4 사회통합 실태조사’에서 진보와 보수 간 갈등을 점수화한 결과는 4점 만점에 3.52점으로, 각종 사회적 갈등 이슈 가운데 가장 수치가 높았다. 그동안 심각한 사회 갈등으로 여겼던 수도권과 지방 간 갈등(3.06점)이나 정규직·비정규직 갈등(3.01점), 노사 갈등(2.97점), 빈부 격차(2.96점), 대기업과 중소기업 차이(2.81) 등의 이슈를 모두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셈이다. 세대별로는 중장년층(3.55점)이 노년층(3.53점), 청년(3.47점)에 비해 보혁 갈등에 대해 더 심각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정치를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 가족과 다툼이 생기기도 하고, 정치 성향이 달라 파혼하는 예비 부부가 생겨나는 등 곳곳에서 분열과 갈등으로 인한 생채기가 불거지고 있다. 주부 박경희(60)씨는 매일 ‘극우 유튜브’만 시청하는 남편 때문에 각방을 쓴다고 했다. 박씨는 “나이가 들어 청각도 좋지 않은지 소리를 크게 키우고 영상을 봐 더 스트레스”라며 “주말에 늦잠만 자던 사람이 지난번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 시위 때는 갑자기 일찍 일어나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진보와 보수 간 정치 갈등은 남녀 갈등, 세대 갈등, 지역 갈등 등 또 다른 사회 갈등으로 번진다. 3·1절인 지난 1일에도 도심과 대학가 등 전국 곳곳에서는 대규모 탄핵 찬반 집회가 열렸다. 서울시 생활인구 데이터 등에 따르면, 탄핵 촉구 집회의 전체 참가자 중 2030 남성은 8.6%에 불과하지만 2030 여성의 비율이 27.6%에 이르는 등 참가자들도 젠더와 세대에 따라 양분되고 있는 모양새다. 또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하는 부모를 향해 자녀들이 ‘수구 꼴통’이라고 비하하거나, 야당을 지지하는 자녀 세대에게 ‘집안 망신’이라고 말하며 세대 갈등을 겪기도 한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때는 아예 TV를 켜지 않고, 고향이 다른 예비 부부가 정치 이야기가 나올 것을 우려해 상견례를 미루는 일도 있다.
성균관대 사회학과 구정우 교수는 “정치 갈등이 심화될 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갈등, 젠더 갈등까지 겹쳐 사회가 분열되고 있다”며 “정치적인 문제가 개개인의 여러 관계에 갈등을 일으키는 일을 막기 위해선 사회 전체가 나와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는 통합의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한편 갈등 수준은 점점 높아지는 반면, 정부나 사회 전반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낮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행정부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2021년 47.91%(‘신뢰 안 함’은 52.09%)에서 2023년 41.13%, 지난해 39.07%를 기록했다. 지난해 입법부에 대한 신뢰도는 국가 부문 가운데 가장 낮은 24.59%에 머물렀다. 다만 사법부 신뢰도는 2019년 33.32%에서 지난해 43.66%로 상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