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개혁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보험료율(내는 돈)을 27년 만에 9%에서 13%로 올렸다. 소득대체율(받는 돈)도 40%에서 43%로 올려 미래 세대의 부담을 덜어주는 면에서 미흡하다는 비판이 많지만, 어쨌든 보험료율 인상으로 국민연금의 덩치는 최대 3배로 커지게 생겼다. 이번 보험료율 인상이 없었으면, 국민연금 적립금은 2039년 1972조원으로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걸었을 것이다. 보험료율을 13%로 인상한 덕에 현재 1213조원(작년 말 기준)인 국민연금 적립금이 2053년엔 3659조원(연평균 수익률을 5.5%로 가정한 시나리오)으로 불어난다. 종잣돈이 훨씬 더 커지는 만큼 돈을 어떻게 굴리느냐에 따른 수익 변동 폭도 더 커질 것이다. 이번 연금 개혁으로 기금 고갈 시점이 2056년에서 2064년으로 8년가량 늦춰진다고 한다. 기금 수익률을 1%포인트만 올리면 고갈 시점을 7년 더 늦출 수 있다. 향후 70년간 국민연금의 연평균 목표 수익률은 5.5%이다. 전 세계 연기금 중 수익률 1위(10%)인 캐나다연금(CPP) 수준까지 수익률을 높이면 연금 고갈 시점을 30년 가량 늦출 수 있다.
◇국민연금 작년 수익률 15%
1988년 출범한 국민연금은 작년 말까지 보험료로 859조원을 걷고, 737조원의 수익을 내 총 1596조원의 기금을 조성했다. 이 중 384조원을 연금 급여로 지출하고 현재 1213조원이 남아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이 돈을 굴려 160조원의 수익을 내며 15%라는 놀라운 수익률을 기록했다. 미국 증시의 초활황 덕에 해외 주식 투자에서 34.3%라는 경이적인 수익률을 낸 덕분이다. 하지만 이 수익률은 원화 기준이고, 달러 기준으로 환산하면 18%대로 떨어진다. 해외 채권(17.1%)과 대체 투자(17.0%)에서도 고수익을 낸 반면 국내 주식 투자에선 -6.9%의 손실을 기록했다. 기금 설립 이후 지난해까지 해외 주식 투자에선 15.1% 누적 수익률을 기록한 반면, 국내 주식 투자 수익률은 5.4%에 불과하다. 채권 투자에선 해외 채권 투자(5.8%)가 국내 채권 투자(3.7%)보다 높기는 하지만, 주식만큼 격차가 크지는 않다.
◇계속 줄어드는 국내 주식 투자
현재 기금 투자 포트폴리오는 해외 주식 35.5%, 국내 채권 28.4%, 대체 투자 17.1%, 국내 주식 11.5%, 해외 채권 7.3%이다. 중기 자산 배분 계획에 따르면 국내 주식 투자 비율은 15% 정도인데, 작년 주가 하락 탓에 국내 주식 보유액이 139조원대로 줄어든 결과, 비율도 축소된 상태다. 중기 자산 배분 목표 15%에 맞추려면 국내 주식을 40조원 이상 더 채워 넣어야 한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올 들어 국내 주식을 꾸준히 매입하며 요즘 같은 폭락장에서 증시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 투자 비율을 계속 줄여 왔다. 2020년 기금 규모가 833조원이었을 때, 국내 주식 투자액은 176조원(비율 21%)에 달했다. 보험료 수입보다 연금 지출액이 더 커지는 시점이 도래했을 때, 연금 지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민연금이 주식을 대거 매물로 내놓을 경우 증시가 큰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기에 국내 주식 투자 비율 축소는 불가피하다는 게 국민연금 측 설명이다. 하지만 연금 개혁으로 기금 덩치가 더 커지고, 기금 고갈 시점도 늦춰지는 만큼 포트폴리오 배분 전략을 재검토할 필요성이 생겼다.
◇28년간 국내 주식 336조원 더 매수해야
국민연금 중기 계획에 따르면, 2029년에는 해외 주식을 42%까지 늘리고, 국내 주식 비율은 13%로 줄일 예정이다. 2053년 기금이 3659조원으로 불어나고, 국내 주식 비율을 13%로 가정하면 연금이 보유할 국내 주식 보유액은 475조원이 된다. 작년 말 기준 국내 주식 투자액은 139조7000억원 수준이다. 향후 28년간 연금이 국내 주식을 336조원 더 사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작년 말 기준 기금의 국내 주식 투자 TOP10은 삼성전자(34조원), SK하이닉스(8조2235억원), LG에너지솔루션(5조5196억원), 삼성바이오로직스(3조6167억원), 네이버(3조3861억원), 현대차(3조원), 기아(2조8576억원), 포스코홀딩스(2조6894억원), 삼성SDI(2조 4678억원), LG화학(2조3484억원) 등이다. 삼성전자를 제외하고는 해외 주식 투자 1~2위인 애플(13조원), 마이크로소프트(11조원)보다 투자액이 훨씬 적다.
◇국내 주식 투자 수익률 더 높여야
최근 10년간 일본 증시의 주가 지수 상승률이 297%로 한국(61%)보다 월등히 높다. 여기엔 2150조원을 굴리는 일본 공적연금(GPIF)의 공이 컸다. GPIF는 10여 년 전부터 투자 포트폴리오를 변경, 국내와 해외 투자 비율을 50대50으로 하고, 투자금의 25%를 국내 주식에 투자해 왔다. 일본 증시에서 큰손 역할을 톡톡히 하며, 증시 밸류업(기업 가치 제고)을 이끌어 온 것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일본 공적연금의 지속적인 주식 투자 확대가 시장 저평가를 해소하고, 일본 밸류업 정책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우리도 국민연금이 증시 밸류업의 견인차 역할을 하면 연금(수익률 상승), 기업(자금 조달), 국민(노후 대비) 모두에게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정부가 세제 혜택을 통한 기업 주주 환원 확대, 중복 상장 규제, 배당소득 분리 과세 등 밸류업 프로그램부터 착실히 추진해 가야 한다.
수익률 세계 1위 연금 되려면
국민연금이 캐나다 연금처럼 수익률 세계 1위 기관이 되려면 지배 구조 개편, 서울 사무소 설치, 직원 인센티브 강화 등 대대적인 조직 쇄신이 필요하다.
우선 국민연금이 정치에 휘둘리는 ‘연금 사회주의’ 위험에서 벗어나, 오직 수익 중심으로 운영되려면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를 정부에서 독립시키고, 전문가 체제로 개편해야 한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이고, 고용노동부, 농림축산식품부 등 네 부처 차관이 당연직 위원이며, 공공노조 위원장, 한국노총 부위원장 등 이사진 면면이 투자 전문가와는 거리가 멀다.
캐나다 연금의 경우 본부(CPP)와 투자 기관(CPPIB)이 분리돼 있고, CPPIB의 이사회는 1급 투자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다. 또 CPPIB법에 “(정치적 고려 없이) 수익률 하나만 보고 투자를 해야 한다”고 못을 박아놔 외풍을 차단할 수 있게 해놨다. 투자 전문가들이라 부동산, 인프라, 사모 펀드 등 고난도 분야에 투자하는 ‘대체 투자’ 비율이 60%에 달한다. 기본 연봉 외에 성과 보수도 별도로 받아 실력 있는 직원은 수십억 원대 보수를 받는다.
반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평균 연봉이 1억원 남짓이다. 공공기관 인건비 제한을 받기 때문에 과감한 인센티브 지급이 불가능하다. 우수 인력을 유치하기 어렵고, 유치한다 해도 경력만 쌓고 금방 떠난다.
1200조원대 돈을 굴리는 국민연금은 ‘세계 자본시장의 큰손’인데, 외국 투자 기관들이 이름도 모르는 지방 도시, 전주에 본부가 있다. 기금운용본부장을 지낸 A씨는 “월가의 거물이 아시아에 출장을 오면 촘촘한 일정으로 홍콩, 싱가포르, 일본, 한국을 한 바퀴 도는데, 왕복에 6~7시간씩 걸리는 전주 방문은 엄두도 못 낸다”면서 “본부를 서울로 옮기거나, 최소한 서울 사무소라도 설치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