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세계에서 오직 정신력만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면, 북한이 우승을 휩쓸 것이다. 그 나라는 “닭 알에도 사상을 재우면 바위를 깬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현실은? 종목에 걸맞은 체격과 훈련법, 전략부터 갖춰야 한다. 21세기 스포츠에서 정신력 타령만 하는 것은 스텔스기가 출격한 전쟁터에서 “죽창 들고 진격하라” 소리치는 꼴이다. 죽창, 그걸로 뭘 어떻게 할 건데.
한국 여자 배구가 도쿄 올림픽에서 4등 한 일이 ‘김연경 리더십’의 쾌거로 추앙받는다. 물론 맞는 말이다. 코트 위에서 구르고 울부짖는 김연경의 모습을 실제로 보면, 금박 광배(光背)를 휘감은 기독교 성화 속 인물처럼 압도적인 빛을 낸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도쿄의 여자 배구는 전략의 승리였다. ‘외국인 사단 3인방’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과 세자르 에르난데스 코치, 안드레아 비아시올리 전력분석관은 한국이 상대할 11국의 최근 3년치 경기 영상과 분석 자료를 테라바이트(TB) 규모로 저장해 밤낮없이 살폈다. 오롯이 김연경의 정신력에만 기댔던 대회는 2012 런던 올림픽이다. 스물넷 김연경은 8경기 207득점이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으로 올림픽 MVP에 뽑히고서도 메달은 놓쳤다. 당시 영상을 다시 보면 작전타임은 앵무새다. “침착하게 하나만 하자고. 자, 한국!”
작년 초 라바리니 사단을 처음 봤을 때, 이들의 최대 고민은 한국 선수들 이름 외우기였다. “김씨가 너무 많은데, 특히 김연경과 김연견은 이름이 정말 비슷해서 데이터 값을 입력할 때 실수를 몇 번이나 했어요. ‘연경’과 ‘연견’을 어떻게 구별하나요!” 김연견은 현대건설 리베로 선수로, 국가대표 발탁은 2017년이 유일했다. 하지만 이들은 V리그 여자부 6구단 선수를 편견 없이 샅샅이 훑으며 선수별 점프 높이, 스텝 횟수, 공격 및 수비 패턴, 리시브 정확도, 서브 성공률 등 지표 수십 가지를 데이터로 변환해뒀다. 올 초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가 이탈하는 대형 변수가 생겼는데도 금세 새 해법을 찾아나간 비결은 이 데이터에 있다.
이들은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참가 16국 중 15위를 하는 ‘장렬한 모의고사’를 치렀지만, 한 달 뒤 올림픽 본고사에서 멋들어진 반전 드라마를 썼다. 라바리니 감독은 경기 내내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는데, 코치들이 태블릿에 실시간으로 입력하고 분석하는 데이터 내용을 전해 들으며 전략을 수정하기 위해서다. 라바리니 사단은 “열심히 해!”가 아니라 “서브는 이 코스로, 블로킹은 저 자리에서, 스파이크는 그 지점으로” 한 포인트마다 지시했다. 이들의 선수 경력은 전무하다. 라바리니 감독은 배구 팬 출신이고, 에르난데스 코치는 대학 입학 후에야 배구를 알았으며, 비아시올리 분석관은 밀라노 공대 출신 엔지니어다.
야구도 4등을 했다. 강백호는 껌을 질겅질겅 씹다가 “나태한 대표팀 정신력의 상징”으로 뭇매를 맞았다. 김경문 감독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강백호 뒤로 숨었다. 껌보다 중요한 문제는 도대체 선수들을 어떻게 뽑고 어떤 전술을 썼길래 이 지경이 됐냐는 것이다. 야구만 그런 게 아니라 도쿄 올림픽에선 한국 지도자들이 죽창만 든 경우가 흔했다. 김학범 남자 축구 감독은 여름날 버스 에어컨도 못 켜게 했고, 유도와 태권도는 이렇다 할 기술 없이 체력만 흠뻑 쓰다가 ‘노 골드’로 대회를 마쳤다. 펜싱은 오심이 난 줄도 몰랐고, 황선우는 혼자서 헤엄쳤다. 정신력을 문제 삼기엔 병역과 연금 혜택이 걸린 한국만큼 올림픽 메달이 간절한 선수단은 없었다. 스포츠든 뭐든 이제 정신력 타령과는 연을 끊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