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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와 경찰이 줄지어 국회를 빠져나갈 때쯤, 취재차 알고 지내던 한 60대 퇴직 공무원에게 안부 문자가 왔다. 그는 대학 2학년까지 학생운동을 하며 비상계엄을 겪었던 세대였다. 교과서나 영화로만 계엄을 배웠던 나와 그의 차이가 있다면, ‘얼마나 일상이 쉽게 깨어질 수 있는지 아느냐, 모르느냐’였다. 그는 만일을 대비해 먹는 것, 입는 것 대책을 세워 놓으라 했다. 유난이라 생각했던 나와 달리 그는 확실히 두려움을 아는 편이었다. 그에게 1979년 마지막 계엄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기억이었다.

길어진 문자에 전화를 걸었더니, 그의 첫 마디는 ‘국가와 일상을 지키는 군과 경찰이 하루아침에 남의 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국회경비대가 국회의원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계엄군이 조금 더 빨리 진입했다면, 실탄이 든 총구가 시위대를 향해 발사됐다면 다음 날 일상은 없었을 수도 있었다.

비상계엄은 역대 최단 시간인 6시간 만에 끝났지만 일상은 흔들렸다. 여의도에 군 헬기가 내리고, 국회가 폐쇄되는 영화 같은 장면이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중에 단체 카톡방은 출처가 불분명한 여러 소식들과 400km 떨어져 있는 가족들의 걱정으로 가득 찼다. 친구들이 푼돈 모아 희망 걸고 투자했던 코인은 급락하고, 전쟁 중인 이스라엘로 파견 간 친구까지 한국 상황을 걱정했다.

이번 비상계엄을 건의한 장관과 선포한 대통령은 모두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마지막 계엄을 겪었다. 폭력의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같은 일이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찬가지로 폭력을 하나의 대안으로 택하거나 둘 중 하나로 나뉜다. 국가 지도자가 후자를 택한 결과로 온 국민이 비상계엄 트라우마를 갖게 됐다. 계엄을 유지할 생각 없이 경고성으로 했다고 한들 마찬가지다.

그와의 통화가 끝날 때쯤, 45년 전과 지금 달라진 건 없냐고 물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부분은 있다고 했다. 무장 군인들이 자신의 아들같이 보였다는 것이다. 무자비하게 진압하던 옛날 군인들과 달리 국회 보좌진이 책상 쌓아 만든 바리케이드도 넘지 못했고,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하자 곧바로 철수했다. 그는 “국회 창 깨뜨려 진입한 군인도 본의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경찰 기동대원들도 ‘국회의원과 취재진은 들여보내야 한다’며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지휘부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단체가 군과 경찰이지만, 이날 주춤대거나 시민 앞에 고개 숙였던 모습은 45년 전 희생을 반복하지 말아야겠다는 성찰에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상과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 성찰과 고뇌를 바탕으로 한 구성원들의 약속과 신뢰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