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왔다는 몇 가지 신호가 있다. 손과 발이 얼고 몸이 움츠러든다. 사람과 차로 발 디딜 틈 없던 밤의 거리는 한적하다. 하나 좋은 신호는 도로 위 소음이 잦아든다는 점. 창문을 잘 열지 않는 겨울만큼은 수퍼카의 굉음에서 해방될 수 있다. 여름밤 이 소리 때문에 깨본 경험이 한 번쯤 있을 테다. 그럴 때면 생각했다. 모든 차가 전기차로 바뀐다면 사계절 내내 조용히 잠들 수 있지 않을까. 전기차는 엔진이 없고 전기모터로 움직이기 때문에 내연차 특유의 소음이 없다. 한밤중 텅 빈 도로를 마음껏 달려도,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허점이 있다는 걸 최근 알게 됐다. 스포츠카 업체들의 입장은 다르다. 소셜미디어에서 미국 업체 닷지가 올 하반기 출시한 전기차 ‘차저 데이토나’의 홍보 영상을 봤다. 차가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 도로 저 멀리서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스포츠카의 배기음 같기도 했고, 기차 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가 점차 커지더니 차 한 대가 화면 중앙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10초 분량의 영상에서 차가 모습을 드러낸 건 불과 2초다. 영상의 주인공은 차가 아닌 소리였다. 홍보 문구는 ‘들었어?(Hear that?)’. 만약 브랜드 공식 계정에 올라온 영상이 아니었더라면 스피커 광고인 줄 알았을 테다.
굉음 없는 밤은 올까. 점점 부정적 전망에 무게가 실린다. 스포츠카 업체들의 최근 화두는 전기차에 가상의 소리를 내는 것이다. 엔진을 닮은 소리를 만들어 차량 바깥에 장착된 스피커로 내보내는 방식이다. 차저 데이토나는 비행기가 이륙하는 수준인 126㏈(데시벨) 안팎까지 소리를 낼 수 있다. 이런 소리를 둘러싸고 때 아닌 ‘진짜’ 논란도 벌어진다. 이탈리아 페라리는 내년 출시하는 첫 전기차에 ‘진짜 소리(authentic noise)’를 내겠다고 선언했다. 가상의 엔진 소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전기 모터가 돌아갈 때 발생하는 소리를 바꾸거나 증폭시켜 상황에 맞는 소리를 들려주겠단 것이다.
전기차 소리에 매달리는 속내는 절박하다. 스포츠카 업체들에 엔진 소리는 오랜 시간 쌓아 온 ‘유산’이다. 마니아들은 특정 스포츠카의 소리만 들어도 어떤 브랜드인지 알 수 있다. 차주들은 소리를 통해 자신의 차가 대중 브랜드에 비해 더 빠르고, 잘 달릴 수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된다. 그러나 전기차 시대에 들어서면서 큰 소리는 좋은 성능을 담보하지 못하게 됐다. 내연차 시대엔 고성능 분야에서 뒤떨어졌던 대중 브랜드들이 순간 가속력이 좋은 전기차를 내세워 약진하고 있고, 엔진 기술이 없는 업체들도 스포츠카 못지않은 전기차를 내놓고 있다.
매년 겨울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지난 시간에서 어떤 부분을 기억해 유산으로 간직해야 하는가. 선택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으나, 하나는 확실하다. 덜어내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을 덜어내고 깎을 때, 또 다른 겨울을 대비할 수 있게 된다. 자동차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