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겨울 부산에 갔다가 해운대에 있는 우동종합시장을 찾았다. 여행을 함께한 부산 토박이 친구가 ‘핫플’이라며 데려간 곳이었다. 인적 드문 초입을 지나 시장 안으로 들어갈수록 사람들 소음이 커졌다. 맨 안쪽 중정(中庭)에 다다랐을 때는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이른 저녁인데도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우동시장은 1978년 문을 열었다. 많은 전통시장이 그렇듯 2000년대 대형 마트가 생기며 침체를 겪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줄 서는 맛집 하나 없는 ‘콘텐츠’의 부재가 외면의 이유였다. 이 시장이 다시 살아난 건 2022년 5월 작은 와인 가게가 생기면서부터다. 코로나로 직장을 잃은 부부가 임차료 싼 전통시장 안에 10평 남짓한 와인 가게를 차렸다. 박리다매 전략을 폈다. 전통시장에서 쓸 수 있는 온누리 상품권을 이용하면 10% 더 할인된 가격에 와인을 살 수 있다며 손님을 모았다.
손님이 많아지자 부부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산 와인을 바로 마실 수 있도록 시장 안 중정에 테이블을 깔고, 와인잔과 얼음 바구니를 무료로 빌려준 것이다. 이 중정은 횟집과 분식집, 라멘집, 쌀국숫집, 중국집, 치킨집 등이 둘러싸고 있다. 사람들은 이것저것 원하는 음식을 골라 자기만의 주안상을 차렸다. 와인과 노포(老鋪) 감성을 좋아하는 젊은 층 사이에서 소문이 퍼졌다.
유명해지자, 박형준 부산시장을 비롯해 여러 정치인과 연예인이 우동시장에 발도장을 찍었다. 이들이 시장 복판에서 값싸고 맛있는 안주와 와인을 즐기는 모습이 소셜미디어에 자주 올라왔다. 부산 사는 부모님을 모시고 온 대학생·직장인 자녀, 외국인 관광객 등 시장을 찾는 사람들도 다양해졌다. 다른 상인들도 ‘금요일 야시장’을 기획해 와인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각 식당의 주력 메뉴를 내놓는 등 시장 전체가 활기를 찾았다.
이랬던 우동시장이 다시 침체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이달 초다. 중소벤처기업부에서 뒤늦게 일부 업종에 상품권 사용 제한을 둔 것이다. 표준 산업 분류상 주류 소매점에선 상품권을 쓸 수 없게 돼 있어 우동시장의 와인 가게도 상품권 결제가 중단됐다. 가격 이점이 사라지자 주문 취소가 줄이었고, 북적이던 시장은 다시 발길 끊긴 과거로 돌아갔다. 한 상인은 “태풍 온 다음 날 해운대 해수욕장을 보듯 하루아침에 손님들이 사라졌다”고 했다.
서울에도 전통시장 안에서 온누리 상품권을 받고 와인이나 위스키를 싸게 파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여기선 여전히 상품권을 쓸 수 있다. 차이를 알아보니 사업자를 ‘슈퍼마켓’으로 내면 합법, ‘주류 소매점’으로 내면 불법이라고 한다. 과일·채소를 팔면서 주류도 파는 곳은 상품권을 써도 되지만, 오로지 주류만 파는 곳은 안 된다는 것이다.
많은 재고를 떠안게 된 우동시장의 와인 가게는 부산중소기업청에 “유예 기간을 둬 재고 처리만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선처를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사업자를 수퍼마켓으로 바꾸는 방법도 고려했으나 새 단장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어 포기했다고 한다. 결국 수억 원 빚을 진 채 폐업 위기에 몰려 있다. 덩달아 매출이 크게 꺾인 상인들은 당국에 탄원서를 낼 예정이다. 온누리 상품권의 취지는 ‘전통시장을 살린다’는 것이다. 우동시장 중정의 활기를 계속 볼 묘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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