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먹여 살려야 할 앵무새가 있다. 두 마리다. 한 마리는 “짹” “삐루룩” 울고 다른 한 마리는 “꾸웩” “꾸륵” 운다. 돼지인지 새인지 모를 울음소리다. 같이 지낸 지는 세 달 조금 못 됐다. 매일 필수 영양분이 고루 들어갔다는 전용 사료를 챙겨 영양제를 뿌린다. 호두와 귀리, 고추씨·들깨·밀웜 등을 배합해 만든 알곡 위주 사료는 ‘아빠 숟가락’으로 하루 한 스푼. 가끔 사과나 당근 같은 생식, 해바라기씨 간식. 레토르트 식품으로 때우는 나보다 잘 먹는다.
처음부터 이렇게 주려던 건 아니었다. 전용 사료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 집 앵무새 몸무게가 비슷한 또래의 다른 집 앵무새보다 5g 정도 덜 나가는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 녀석은 아직 어린 중형조라 컨디션 좋을 때도 50g에 미달한다. 그래서 알곡 사료를 추가했다. 왠지 부리와 깃털에 윤기가 덜한 것 같다. 영양제를 추가했다. 그렇게 하나씩 더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
반려동물 입양을 수 년간 고민했다. 동물은 통상 지능이 높을수록 욕구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스스로 못 미더웠다. 반려동물로 인한 행복감이 늘어날 집안일을 감수할 만큼 충만한 것인지 확신도 없었다.
똑똑한 조류의 대명사인 앵무새. 키워 보니 한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손 역할을 하는 부리로 이것저것 톡톡 건드려 보다 혀에 대 보고, 일단 씹는다. 전선도 씹고 커튼도 씹는다. 가끔 내 손도. “새장에 두면 되지 않느냐”지만, 그렇게만 두기엔 지능이 높다. 뜯을 만한 온갖 장난감을 새장에 넣어 주고도 매일 꺼내 주변을 탐색할 시간을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아 스스로 깃털을 뽑을 수 있다. 종(種)마다 정도는 다르지만 털도 물론 날린다. 신체 구조상 배변 훈련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냥 싼다.
물티슈 쥐고 쫓아다니다 보면 가끔 한숨이 나온다. 특히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그렇다. 독감에 걸려 앓았던 며칠 전엔 꺼내 달라고 보채며 발가락을 물어 크게 혼냈다.
아이를 키우면 오죽할까 싶다. 미혼 청년은 상상해 본다. 어쩌면 아이 울음소리는 앵무새가 종일 스크리밍하는 소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아이 낳을 생각이 딱히 없었으나 몇 년 전 저출산 기획 취재를 하며 생각이 바뀌었다. 지지고 볶으면서도 자녀 덕에 행복해하는 엄마들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수십 차례 대화할 수 있던 게 컸다.
2015년부터 해마다 줄던 출생아 수가 9년 만인 지난해 반등했다. 그러나 부모가 된다는 것은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책임과 의무를 걸머지는 것이라는 청년들 인식이 반전됐다고 보긴 어렵다는 게 미혼 청년의 생각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쏟아내는 출산·육아 지원책 영향도 없진 않겠으나 ‘반짝 반등’일 수 있다.
부모뿐 아니라 국가도 육아에 동참하는 것은 미혼 청년들에게 긍정 시그널이다. 그런데 앵무새를 돌보는 지금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걸 안다. 흩뿌려진 알곡 껍질을 아침저녁으로 치우면서도 살 오른 몸으로 횃대에서 털을 고르며 “목욕하고 싶다(는 의미로 추정)”고 대야를 부리로 톡톡 치는, 전적으로 나에게 의탁한 여린 생명체에 대한 돌봄 자체가 주는 행복. 사랑하는 이와 웃고 떠드는 즐거움,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의 가치를 새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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