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하얀 도화지에 흘린 물감 신세였다. 지난 휴가로 찾은 제주도 얘기다. 많은 이들이 물가 때문에 해외로 발길을 돌리고 있지만, 제주 여행의 장점은 분명하다. 복잡한 절차 없이 차를 빌리고, 뻥 뚫린 해안 도로를 달릴 수 있다. ‘효도 여행’이란 이름에 걸맞게 한 고급 브랜드의 세단을 빌렸다. 그러나 변수가 여기서 생길 줄은 몰랐다. 일행 앞에 나타난 것은 빨간색 세단이었다. 날것 그대로의 빨간색.

그 차로는 어디를 가도 존재감을 숨길 수 없었다. 그날 제주도에 유독 흰색 차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렌터카 업체들이 흰색 차를 주로 들여오기 때문. 흰색은 가장 무난하게 인기 있으면서, 흔히 관광지에 바라는 밝은 느낌을 내기에 최적화된 색이라고 한다. 모두가 무난함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 아닐까. 그 행렬에서 벗어난 빨간 차는 따가운 눈초리를 감내해야만 한다.

변화는 물론 있다. 직장가에 ‘칼정장’ 무리 대신 ‘슬리퍼족’이 등장하는가 하면, 가장 보수적 소비재인 자동차에도 10개 넘는 색상 선택지가 생겼다. 그러나 실상은 다소 기만적이다. 검은색, 흰색에 각종 보석의 이름을 붙인 색상이 나오고 있고, 유채색의 껍데기를 쓴 무채색도 여럿이다. 분명 이름에 ‘그린’과 ‘블루’가 붙어 있는데 실물이 검은색에 가깝다. 개성을 찾는 유채색이 늘어나는 동안 무채색에 가까운 유채색들이 늘어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복장 자율화를 선언한 회사에서도 ‘슬리퍼는 좀...’ ‘레깅스는 좀…’이란 말이 종종 나온다. 개성을 추구하고 싶고, 동시에 무난함에서 벗어나기 두려워하는 우리의 현주소라고 생각한다.

한때 형형색색의 개성을 지닌 세대로 묘사됐던 2030조차 이젠 그 빛이 바래고 있다. 이 세대에선 모방 소비를 뜻하는 이른바 ‘디토 소비’가 유행이다. 연예인과 인플루언서의 콘텐츠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 세대에 빠르게 번지면서, 영상 속 인물들의 구매 취향을 따라 한다는 것이다. 요리·춤 같은 행위를 모방하고 다시 온라인에 올리기도 한다. 모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마냥 웃거나 비난할 수만은 없다. 유행과 모방은 필수이며, 그 행렬에서 따라가지 않는 이들은 ‘애늙은이’ ‘이단아’로 분류되곤 한다. 무난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오랜 역사는 이 세대 역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2030 세대의 개성 표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실제 그 세대가 느끼는 것보다 부정적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러닝크루가 한 예다. 길거리를 막는 등 각종 소음과 잡음이 부각되며 부정적 여론이 크지만, 모든 러닝크루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얼마 전 한 지자체에선 러닝크루가 시민들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민원이 들어오자, ‘5인 이상 단체 달리기 제한’이란 초강수를 내놨다. 러닝크루가 시민들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이유에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개성 표출을 막는 일도 옳지는 않다. 둘 사이의 현명하고 아름다운 균형은 어디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