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헌재 최후 변론에서 개헌 추진 의사를 밝히고 탄핵이 기각되더라도 임기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다. 남은 2년여 임기를 다 채우지 않겠다는 뜻인데 다소 막연하다는 느낌을 준다. 헌법재판관들과 국민에게 보다 명확한 의지를 전달하기 위해선 언제까지 개헌을 마치고 물러나겠다고 분명히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윤 대통령 주변에선 내년 6월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실시하고 그 즉시 물러나는 방안도 거론됐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국민의 60% 안팎에 달하는 탄핵론을 잠재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금 윤 대통령이 몇 달 더 임기를 채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탄핵이 기각되면 그로부터 6개월 내에 개헌을 마치고 바로 물러나겠다고 하면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을 수 있고 헌법재판관들도 이를 참작할 것이라고 본다.
탄핵의 목적은 형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직(職)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다. 지금 물러나게 하는 것과 6개월 뒤 물러나는 것의 차이는 크지 않다. 일각에서는 위헌 불법 계엄을 한 사람이 6개월 뒤에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것은 법적 정의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반드시 파면해 다시는 계엄이 없도록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모두 옳은 말이지만 지금 우리가 처한 복합적 위기 상황을 감안하지 않은 협소한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윤 대통령이 탄핵되면 우리는 21년 동안 대통령 3명을 탄핵소추하고 그중 2명을 실제 탄핵하게 된다. 정정이 불안한 남미나 아프리카에서나 있을 일이다. 극도의 정쟁이 계엄과 탄핵이라는 과잉 연쇄반응을 부르고 있는데, 어떻게든 이 흐름이 중단되지 않으면 이제 한국 야당의 목표는 당연히 대통령 탄핵이 되고 탄핵이 일상적 정쟁이 된다. 당장 다음 대통령부터 시작될 것이다. 나라가 어디로 가겠나.
헌법은 최고위 정치 문서이고 헌재의 국가 원수 탄핵 재판은 정치적 재판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재판이라는 것은 실정법의 한계에만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정말 지금은 법 차원이 아니라 나라의 역사와 미래까지 생각해야 하는 시점이다.
윤 대통령이 ‘임기 6개월’을 밝히고 헌법재판관들이 이를 참작했으면 하는 것은 이것이 둘도 없는 개헌의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엔 사실상 이재명 대표 한 사람을 빼고 거의 모든 정치인이 개헌에 찬성하고 있다. 지금의 이 권력 구조로는 국민 분열과 상시적 정치 전쟁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표는 정국의 초점이 대선이 아닌 개헌에 맞춰지는 것을 불안해한다. 개헌 후 선거에서도 자신이 유리할 테지만 변수가 생기는 것이 무조건 싫은 것이다. 이 대표가 국회를 장악한 민주당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반대하면 개헌은 어렵다.
만약 윤 대통령 6개월 임기와 개헌을 전제로 탄핵이 기각되면 대선도 그만큼 연기된다. 그 상태에서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이 대표도 이를 막을 명분과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나라는 다시 개헌의 기회를 잡을 수 없을지 모른다. 다음 대통령 임기 후반기가 되면 또 유력 대선 주자들이 나타날 것이고 그들이 개헌을 가로막을 것이다. 정치권 거의 모두가 개헌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바로 이런 다람쥐 쳇바퀴 속에서 개헌론은 헛바퀴만 돌려왔던 것이다.
윤 대통령이 임기 6개월 약속을 지키게 할 확실한 보장책은 없는 것이 사실이다. 1987년 6·29 선언으로 개헌 논의가 시작된 후 정확히 4개월 만인 10월 29일 지금의 헌법이 공포·발효됐다. 개헌에 6개월은 결코 모자라지 않은 시간이다. 윤 대통령이 6개월 뒤에도 물러나지 않고 국민을 속인다면 지지층조차 돌아서서 대통령직 수행이 불가능할 것이다. 헌재가 탄핵 선고를 몇 달 연기해 개헌의 시간을 주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대통령직 공백을 빨리 해소해야 하지만 개헌은 그보다 더 중대한 문제다. 비현실적이라고 하지만 말고 모든 가능성을 생각했으면 한다.
만약 윤 대통령이 탄핵되고 2개월 뒤에 대선이 치러지면 개헌은 물건너 가고 좀비가 된 이 제도가 우리 국민을 수십 년 더 괴롭힐 것이다.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는 논리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거듭 증명됐다. 선거에 이기든 지든 100대0의 싸움이 아닌 60대40의 경쟁이 되는 권력 구조와 지역 대결을 완화할 선거제로 바꾸면 한국 암(癌)인 지역감정과 망국적 당쟁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이것이 지금 한국에 필요한 최대의 국가 경쟁력이다. 여기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문제가 풀려나갈 수 있다.
우리가 왜 지역으로 갈려 싸우고, 널 죽여야 내가 살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해야 하나. 그래야만 하는 인종적·종교적·이념적 근본 구조가 우리 사회 어디에 있는가. 순전히 정치 갈등이 도지고 자라나서 생긴 암이다. 그 암을 치유할 실낱같은 기회가 있다. 윤 대통령과 헌법재판관들, 이 대표가 용기와 결단으로 우리 역사에 또 하나의 6·29 ‘통합의 기적’을 탄생시켜 주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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