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휴대전화를 바꿨다. 신기한 기능이 많아 3년 동안의 기술 발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번역 기능이 놀라웠다. 상대방이 사용하는 외국어가 몇 초 만에 한국어로 번역됐고, 내가 말하는 한국어도 외국어로 금방 번역돼 표시됐다. 모르는 외국어를 쓰는 상대방과 의사소통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 것 같다. 인공지능(AI) 기술이 더 발전하면 실시간 통역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어질까?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라면 외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 외국 여행 중 호텔 체크인, 식당에서 음식 주문, 길 물어보기는 AI 번역기가 잘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다. 국제회의 통역이나 병원 진료와 같은 고급 작업도 AI 번역기가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면해 입으로 소통하는 것은 번역기를 통한 의사소통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말을 주고받으며 상대방의 눈빛과 표정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상대방의 몸짓을 보고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이러한 대면 소통 덕분에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유대감을 느끼고 인류애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극장에서 외국 영화를 볼 때 더빙보다 자막을 선호하는 이유는 배우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면서 목소리의 톤과 말투를 통해 인물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건 언어를 배우는 것이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언어에는 그 사회의 삶의 방식, 가치관, 세계관이 녹아 있다. 외국어를 배우면서 우리는 다른 언어권의 인생관과 문화를 이해하고, 세상을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의 사회와 문화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가 짧은 시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것은 우리 국민이 외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세계를 향해 눈을 뜬 덕분이다. 그간 한국인들은 비즈니스, 여행, 유학, 연수, 회의로 세계 각국을 누비고 다녔고 이것이 우리나라를 이만큼 발전시켜 온 원동력이었다.

그럼에도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영어를 제외한 외국어 교육이 점점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대학 입시나 공무원 시험 등에서 제2외국어 과목의 비중이 축소되고 있다. 대학들도 제2외국어 필수 이수 학점을 줄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인들도 다른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외국 문화에도 관심이 많다. 미국 대학 입학 시험인 SAT에도 외국어 시험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스페인은 내가 유학 생활을 하던 3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보다 경제력이 두 배나 높았다. 그러나 외국어를 배우는 데 그리 열심이지 않았고 해외로 나가는 유학생, 비즈니스맨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머지않아 스페인이 한국에 따라잡힐 것이라고 예상했고, 실제로 우리나라가 스페인의 경제력을 추월했다. 최근 들어서야 스페인 대학에도 한국어·중국어·일본어학과가 개설되며, 아시아 언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급증하고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외부에 관심을 갖고 세계로 나아간 민족들이 성공을 거둔 사례가 반복돼 왔다. 인터넷과 AI 기술의 발전으로 집에 앉아서도 세계 소식을 접하고 외국어를 손쉽게 번역할 수 있게 됐지만, 밖으로 나아간 민족들이 성공을 거둔 역사의 흐름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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