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행 뉴욕 특파원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미국 대선에선 ‘선거 현장’이란 것이 증발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이 모이지 못해서다. 전당대회와 대중 유세는 사라지다시피 했고, 선거철 집집마다 앞뜰에 꽂혀있던 지지 팻말도 찾아보기 어렵다. 각종 여론 지지율 조사가 쏟아지지만, 4년 전 대선에서 유수의 여론조사와 전문가 예측이 뒤집어지는 것을 목격한 미국인들은 이제 숫자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세계가 숨죽여 지켜보는 미 대선이 물밑 표심을 가늠하기 어려운 ‘깜깜이 선거’가 된 것이다.

남은 건 연일 쏟아지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말뿐이다. 언론들이 팩트체커 팀을 꾸려 열심히 발언의 진위를 검증해나가지만, 대통령의 트위터와 기자회견을 통해 쏟아지는 근거 없는 주장과 음모론, 막말을 일일이 거르고 바로잡기엔 역부족이다. 오히려 트럼프가 매일 던지는 말들은 각 매체의 헤드라인을 간편하게 장식해준다.

‘대선 현장’이라는 관점에서 중요한 건 트럼프 대통령의 말이 옳으냐 그르냐보다는, 그가 대선 여론의 장(場)을 점령했다는 사실이다. 서점의 정치 코너에 나온 100여 종의 책들은 트럼프를 격렬히 비난하거나, 트럼프를 격렬히 숭배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트럼프의 국정 운영 비화부터 가족사, 그의 정신 세계에 이르기까지 온갖 분석과 폭로를 담은 책이 출간되는데, 나왔다 하면 몇백만 부씩 팔려나간다. 누군가는 그의 천재성과 리더십에 감격하면서, 누군가는 이런 사람을 대통령으로까지 만든 미국이란 나라를 저주하면서 이 책들을 사 본다.

트럼프는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다. 그가 미국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전 세계가 왜 위협받는 미국의 우편투표 제도를, 불합리한 선거인단 승자독식 제도를, 중서부 백인 저학력층의 분노를, 뉴욕 부동산 사업가 가문의 대를 이은 탈세를, 대통령 부인과 전처 자식 간의 갈등을 연구했겠는가.

이런 여론 선점 경쟁에서 바이든의 설 자리는 없다. 바이든은 민주당 지지자들이 과거 그랬듯 정말 사랑해서 밀어올린 후보라기보단, 트럼프에게 실망한 중도층을 빼앗아 올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이유로 고민 끝에 내보낸 인물이다. 처음부터 트럼프의 프레임 안에서 대선 레이스를 시작한 바이든은 40년의 의정·국정 경력과 뛰어난 공감 능력, 야권 지지자들의 폭발적인 정권 교체 욕구 같은 든든한 배경을 갖고도, 매번 트럼프가 휘저은 판을 수습하며 뒤따라가느라 자신의 페이스를 잃곤 한다.

이런 선거는 개연성도 진실성도 없이 시청률만 노린 성인용 막장 드라마와, 착하고 반듯한 인물들이 출연해 감동을 주는 전 연령 시청 가능 홈 드라마의 게임이나 다름없다. 이미지와 편 가르기만 난무하는 시대, 진실보다 시청률이 중요한 시대의 선택은 어느 쪽이 될까. 분명한 건 이런 막장 드라마 같은 정치에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길들여졌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