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 서울 서초동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음악원에 취재차 들르면 학교 복도까지 들리던 고함 소리가 있었다. 십중팔구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한국 바이올린의 대모’ 김남윤 명예교수의 연구실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고함 소리는 언제나 같았다. “더!” “길게!”
연주하는 음을 더 크게 표현하거나 중간에 끊지 말고 끝까지 지속시키라는 스승의 엄명이었다. 생전 김 교수는 아침 9시면 학교에 나와서 샌드위치와 김밥으로 점심을 대신하면서 하루 8~9시간씩 연달아 학생들을 가르치는 열강(熱講)으로 유명했다. ‘하루 연습을 거르면 자신이 그 사실을 안다. 이틀이면 비평가가 안다. 사흘이 되면 청중이 알게 된다’는 말을 연구실에도 붙여 놓았다. 제자들을 향한 무언의 압박이었다. 스승의 잔소리는 비단 악보 해석이나 연주법에만 그치지 않았다. 복장이 조금만 단정하지 않아도, 말이나 행동에 흐트러짐이 보여도 어김없이 호통이 떨어졌다. “평상시 습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주에도 스며든다”는 것이 고인의 철학이었다.
혈액암으로 투병했던 고인은 지난달까지도 음악 영재들을 기르는 한예종 산하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 휠체어를 타고서 나왔다. 직접 가르치고 심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고인이 습관처럼 했던 말은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죽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이었다. 자신의 다짐을 말 그대로 지키는 모습도 처음이었다. 부군 이승호씨도 “남윤이는 병석에 누워서도 제자들이 연주를 성공적으로 마치거나 콩쿠르에 입상했다는 소식만 들으면 미소를 지었다”고 회고했다.
여기까지는 음악계에도 비교적 많이 알려진 내용들이다. 하지만 음악계 지인들조차 잘 몰랐던 내용도 있다. 생전 고인은 제자들에게 무섭게 꾸짖고 나면, 언제나 옆방의 동료 교수실로 달려가서 눈물을 쏟았다. 자신의 가르침을 쉽게 따라오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안타까움, 자신의 질책이 혹시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자책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바로 옆방의 동료 교수였던 피아니스트 김대진 한예종 총장은 “어떤 스승이 되어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신 고인의 모습은 제게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었다”고 했다.
한국 클래식 음악계가 눈부신 비약을 할 수 있었던 동력을 꼽으라면 언제나 두 가지를 든다. 1993년 한예종 음악원 설립과 1998년 시작된 금호영재콘서트다. 음악 영재들의 재능을 조기 발굴하고 실전 무대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해외 유학 없이도 세계 무대에 진출할 수 있게 됐다. 이 두 사건의 ‘공통분모’에 해당하는 음악인이 김남윤 교수다. 첼리스트 정명화, 피아니스트 강충모·김대진 같은 스타 연주자들과 함께 한예종 창립 멤버로 들어가서 후학을 양성했고, 금호영재콘서트를 통해서 그 제자들을 무대에 세웠다. 중견 교수부터 젊은 스타 연주자들까지 고인의 제자들을 일일이 적다 보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고인이 2005년 금호음악스승상을 탄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지난 15일 한예종 음악원 교사(校舍) 앞에서 제자들과 음악계 관계자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의 추도식이 열렸다. 추도식이 시작하기 전부터 눈물바다를 이루는 광경도 처음이었다. 생전 고인의 일화가 소개될 적마다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추도식이 끝날 무렵, 유족과 제자들은 고인의 영정을 들고서 생전 고인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한예종 음악원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날 음악원에 걸린 추모 플래카드에는 생전 고인의 말이 적혀 있었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될 때까지.” 이 말이 ‘음악 강국’ 한국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