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캐나다에 이어 유럽연합(EU) 27회원국이 연내 백신 접종을 시작하기로 했다. 일본도 화이자·모더나 백신 8500만명분을 확보해놓고 곧 접종에 들어갈 예정이다. 동남아시아에선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등이 화이자·모더나 백신을 상당 수준 확보했다. 중국, 러시아는 안전성 검증에 의문이 제기되고는 있지만 독자 백신을 개발해 자국 국민에게 접종하고 있다. 몇 달 뒤 이 나라들에서 집단면역이 이뤄지면, 한국은 ‘코로나에서 안전한 나라들'에 둘러싸여 혼자 ‘위험 국가'로 고립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
화이자·모더나 백신을 확보한 나라들은 지난 7~8월 임상 3상 시험 착수 전후로 효과와 안전성을 검토해 선구매 계약을 맺었다. 우리 정부는 제약사들에서 똑같은 자료를 받았지만 선구매를 미적거렸다. “우리는 코로나에 잘 대처해 백신 구매가 시급하지 않다. 백신 안전성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댔다. 코로나 확진자 수를 잘 억제했다 하더라도 어차피 코로나에서 벗어나려면 백신을 쓸 수밖에 없는데도 그랬다. 안전성을 100%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더라도 다른 선진국들처럼 여러 백신 개발사와 계약해 위험을 분산하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겨울철 코로나 대유행 가능성을 무시한 것도 정부의 결정적 오판이었다. 정부 무능 때문에 국민이 큰 대가를 치를지도 모르게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확대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코로나 재확산의 고리를 완전히 끊어내야 한다. (우리 경제는 잘해왔고) 가장 큰 수확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가치를 높인 것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코리아 프리미엄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최근 방역 둑이 무너져 하루 1000명씩 확진자가 나오면서 국민이 크게 불안해하고 있다. 대통령이 방역 성과를 내세울 때가 아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코로나) 백신 보급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라”는 말도 했다. 확보했다는 백신이 내년 상반기 중 들어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어떻게 보급을 빨리 하라는 건지,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다.
지금 국민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백신을 언제 들여올 수 있고 언제부터 맞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가장 궁금한 부분을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당국자들은 제약사와 비밀을 유지하기로 한 조항이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상세한 협상 경과와 내용을 밝히지 않고 있다. 만약 잘되고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아니다. 정부는 무슨 판단에서 백신 확보를 미적거렸는지, 누구 결정으로 그렇게 했는지, 지금이라도 백신 도입 날짜를 앞당길 전망이 있기나 한지 국민에게 소상히 설명해야 한다. 지금 코로나 창궐로 국민 건강이 위기에 놓여 있는데 대통령한테서 아직도 K방역 자랑하는 얘기가 나올 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