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압박하기 위해 발표한 수출 통제 조치의 면제 대상으로 지정한 32국에서 한국이 빠졌다. 최근 미국 상무부는 외국 기업이 미국의 기술과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만든 반도체·컴퓨터·통신·레이저·센서 장비를 러시아에 수출하기 전 미국 허가를 일일이 받도록 했다. 러시아에 대한 전략 물자 공급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미국과 비슷한 수준의 대러 제재를 발표한 유럽연합 27국과 일본, 호주,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 모두 32국은 이런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공지했다. 그들의 판단을 믿고 맡길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 대상에서 제외됐다. 충격적인 일이다. 70여 년간 동맹 관계를 유지해온 한국을 신뢰하기 어려운 나라로 분류한 셈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동맹국 가운데 유일하게 대러 제재 동참을 망설였다. 러시아의 무력 침공이 시작되자 문재인 대통령이 “경제제재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동참해나갈 것”이라고 했지만 독자 제재는 다시 유보했다. 그러자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공동 대응을 강조하며 대러 제재에 동참하는 국가를 거명했는데 한국은 쏙 빼놓았다. 미국 조야에선 한국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정부는 뒤늦게 러시아에 대한 전략 물자 수출을 차단하기로 결정해 미국 측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허겁지겁 뒷수습에 나선 것이다.
정부가 신중을 기한 배경은 짐작이 간다. 러시아의 보복 조치가 우리 안보와 경제에 미칠 파장을 우려했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도 이런 고려를 안 했을 리 없다. 국제사회의 연대에 동참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70여 년 전 우리가 북한의 침공을 받았을 때 미국을 포함한 16국의 도움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세워진 한미 동맹 체제 위에서 우리는 번영의 역사를 써 왔다. 동맹은 목숨 걸고 서로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이다. 네가 공격받으면 나도 함께 피 흘려 싸워주겠다는 다짐이다. 상대방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어야 유지될 수 있는 관계다. 그러나 한미 동맹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32국에도 끼지 못하는 사이가 돼 버렸다. 신뢰를 잃은 동맹은 껍데기나 마찬가지다. 동맹국이 공동 행동을 요구해 왔을 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뒤로 빠지려 한다면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