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4일 초과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도록 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의 재의(再議)를 요구했다. 윤 대통령이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취임 이후 처음이다. 양곡법은 처리 절차와 내용 모두 문제가 큰 법안이다. 민주당은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위안부 재단 관련 비리로 출당된 무소속 윤미향 의원을 상임위 안건조정위에 넣는 꼼수를 썼다. 법사위에서 제동이 걸리자 다시 윤 의원을 이용해 본회의에 직접 회부했다. 이렇게 여야 간 제대로 된 토론조차 없었다. 법 내용도 불합리하고 반시장적이다.
이 법은 쌀 초과 생산량을 정부가 전량 사들이는 내용이 핵심이다. 쌀이 남아돌아 매년 10여 만t이 사료·주정용으로 처분되는데 쌀 매입에 매년 1조원 이상의 국민 세금을 퍼부어야 한다. 국가 재정에 과도한 부담을 주고 쌀 과잉 생산을 부추길 것이다. 쌀값이 오히려 떨어질 거란 우려에 40여 개 농민 단체가 반대했다. 빵·면류·육류 소비가 급증하는 속에서 쌀 경작 면적을 줄여가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민주당의 ‘식량 안보’ 주장도 낡은 것이다. 지금 세계 어느 나라도 식량 수입이 봉쇄된 곳은 없다. 북한조차 그렇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도 이 법에 반대했다. 당시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 시 쌀의 공급과잉과 정부 의존도가 커지는 부작용 발생이 우려된다”고 했다. 민주당은 그때도 압도적 의석을 보유했지만 이 법을 추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는 ‘안 된다’고 하다가, 정권이 바뀌자 ‘해야 한다’고 돌아선 법안이 한두 개가 아니다. 공영방송 이사와 사장을 쉽게 바꾸지 못하게 하는 방송법, 불법 파업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노란봉투법’ 등이 그렇다. 대부분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자신들 득표에만 도움이 되는 법안들이다. 국회 소수당이 아닌 다수당이 이렇게 무책임한 것은 우리 역사에 없던 희귀 현상이다. 대통령실은 이참에 법률안 거부권 행사 기준을 명확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 양곡법처럼 국회 처리 절차부터 문제가 있거나 그 내용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에 분명히 어긋나는 법안, 나라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표만 생각하는 포퓰리즘 법안 등이 그 대상이다.
민주당은 이들 법안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 자신들은 노동자·농민을 위해 한 일이라고 생색을 내고 이를 거부한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을 씌우면 된다는 계산이다. 내년 4월 총선까지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더 있을지 알 수가 없다. 몰염치한 국회 다수당이 두려워하는 것은 대통령 거부권이 아니라 국민의 거부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