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9일 발효한 상호 관세를 90일간 유예하겠다고 발표했다. 유예 대상은 중국을 뺀 75국 전체다. 무차별 관세 폭탄으로 국제 무역 질서를 뒤집은 것도 놀랍지만 발효 후 24시간도 안 돼 유예한 것도 놀랍다. 보복관세로 맞서는 중국에는 125%로 더 올렸다. 관세 전쟁의 주타깃이 중국임을 명확히 했다.
대통령 부재와 대선 정국이라는 최악의 조건에 있는 우리로선 일단 90일의 시간을 벌게 됐다. 유예 시한은 새 정부 출범 이후지만 트럼프 정부와의 협상은 이미 시작됐다. 8일 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과 트럼프 대통령 간 28분간 전화 통화로 협상의 물꼬가 트였다. 백악관은 “긴밀한 동맹이자 교역 파트너를 우선시한다”면서 한국·일본과 우선 협상에 나서겠다고 했다.
한국·일본이 동맹이어서 협상 기회를 먼저 준다고 했지만 내용으로 보면 동맹국 중 대미 무역 흑자가 많은 나라와 우선 협상해서 신속하게 정치적 성과를 내겠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유럽연합(EU)은 회원국이 많아 협상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일본·베트남·대만 등은 이미 자국 관세 인하, 미국산 제품 수입 확대 등 다양한 협상 카드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도 통상교섭본부장이 방미해 미 무역대표부(USTR)와의 협의에 돌입했다.
통상교섭본부장이 교섭 테이블에 앉지만 경제·통상 협상만으로 문제를 풀지 못한다. 트럼프는 한 권한대행과 통화 후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와 조선·LNG·알래스카 투자 이슈와 함께 주한 미군 방위비 문제를 얘기했다고 밝혔다. 이 현안을 아우르는 ‘원 스톱 쇼핑’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관세로 압박하면서 무역 흑자 축소, 방위비 분담금 추가 인상 등을 얻어내겠다는 것이다. 안보·통상 이슈를 포괄하는 ‘트럼프 패키지’가 전략적으로 필요하다.
트럼프는 1기 때 한국에 방위비 분담금의 5배 증액(50억달러)을 요구했지만 결국 바이든 정부에서 13.9% 인상한 1조1800억원대로 타결됐다. 지난 대선 유세 때 트럼프는 방위비 분담금 연 100억달러(14조6000억원)를 언급했다. 방위비는 차기 정부가 걸린 문제여서 한 대행이 독자적으로 결정하기 어렵지만 일단 우리 측 카드는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비관세 장벽 완화와 조선업 협력 방안, 수용 가능한 방위비 분담금 인상안 등 ‘트럼프 패키지’를 종합적으로 구상하고 협상에 나서야 한다. 범정부 차원의 협상 팀을 구성하고 국회·정당과도 소통하며 거국적인 협상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현대차 등 우리 기업의 대미 투자도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부각시켜 상호 관세 25% 철회를 설득해야 할 것이다.
일본 등 다른 아시아 국가를 주시하면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도 있다. 언제든 말 바꾸는 트럼프 특성상 서둘러 협상을 타결했다가 불리한 조건을 감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