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 후보자 2명을 지명한 것의 효력을 정지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권한대행이 재판관 후보를 지명해선 안 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헌재는 권한대행에게 그 권한이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로써 한 대행이 지명한 보수 성향의 이완규 법제처장과 함상훈 서울고법 부장판사 임명 절차는 중단됐고, 신임 재판관 2명은 새 대통령이 임명할 가능성이 커졌다.
한 대행이 왜 두 사람 임명을 강행했는지, 두 사람 인선도 한 대행이 한 것인지 등은 불분명하다. 다만 이 일을 보면서 헌법재판관들이 헌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각 정당의 정치 이익을 지키는 파견원처럼 된 현실을 다시 느끼게 된다.
헌재가 제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 재판관이 정치성이 옅어야 하고 막중한 책임을 감당할 능력, 경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헌법재판관들이 그렇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헌재의 정치 편향이 심했던 문재인 정권 때는 재판관 9명 중 5명을 진보 성향인 우리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 민변 출신으로 채웠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후 각 정당이 노골적으로 헌재에 자기 편을 심으려 했다. 민주당이 민주당원 같은 성향을 보인 마은혁 판사를 밀어붙였고, 한 대행은 보수 성향이라는 재판관 2명을 임명하려다 실패했다.
이런 풍조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헌재가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탄핵소추안을 기각하긴 했지만 찬반 의견이 4대4로 갈린 게 대표적이다. 민주당이 이 위원장을 취임 이틀 만에 정략적으로 탄핵소추했는데도 야권에서 추천한 진보 성향 재판관 4명은 탄핵에 찬성했다.
헌법은 재판관 9명을 대통령·대법원장·국회가 각각 3명씩 지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서로 견제하라는 권력 분립의 이상이 담겨 있지만 이념·정파로 갈려 실상은 그 반대가 되고 있다.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재판관을 다 국회에서 선출하되 재판관 임명 가결 정족수를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으로 정한 독일 헌재의 모델을 검토할 만하다. 가결 정족수를 높여 정치 편향이 강한 후보는 통과하기 힘들게 만든 모델이다. 이렇게 되면 각 정당들은 상대도 납득할 수 있는 헌법재판관 후보를 찾으려 노력할 수밖에 없다. 지금 헌재를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만큼 정치권에서 논의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