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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의인 이수현 씨의 24주기를 맞아 지난 26일 일본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이씨 모친 신윤찬씨와 헌화하고 있다./연합뉴스

이번 설 연휴 130만명을 넘겼다는 해외 출국자 무리에 섞여 일본 도쿄에 다녀왔다. 일요일이던 지난 26일, 일본인 친구 집에서 NHK 뉴스를 보는데 신오쿠보역 사고 24주기 소식이 나왔다. “2001년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와 일본인 남성 세키네 시로씨가 승강장에서 철로로 떨어진 남성을 구해주려다 벌어진 사망 사고로부터 24년. 이씨 어머니 등 관계자들이 현장을 찾아 묵념했습니다.”

일본이 매년 1월 26일 고(故) 이수현씨를 어김없이 추모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한국인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시선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처럼 확 달라지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라고 친구는 설명했다. “일본인들은 남의 무거운 가방 대신 들어주는 일조차 쉽게 엄두를 못 내는 개인주의에 익숙한데, 이수현씨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생면부지 타인의 죽음을 막아보려는 놀라운 일을 한 거야. 그전까지 대다수 일본인에게 한국은 가난하고 별로 안 엮이고 싶은 친척 같은 존재였는데, 그런 선입견이 이 일을 계기로 차츰 지워졌다고 생각해.”

진심이 선입견의 지우개로 기능한다는 한일 관계 경험칙은 양방향으로 성립한다. 악(惡)이라 여겼던 일본이 순전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엔 25년 전 맞닥뜨린 일본인의 눈물이 그랬다. TV 채널을 뒤적거리던 2000년 8월의 어느 날, 톱스타 아우라가 흘러넘치는 일본 남자가 더듬더듬 한국어로 말하는 걸 봤다. “저희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노래해왔지만 한국에선 노래를 부를 수 없었습니다. 과거사를 함께 슬퍼하면서, 저희는 저희의 새로운 시대를 함께 만들어 나갑시다.” 이어서 노래 ‘온 유어 마크(On your mark)’가 연주됐는데, 그는 울먹거리느라 1절을 거의 못 불렀다. 그 순간, 일장기 너머의 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날 울었던 남자가 일본의 2인조 밴드 ‘차게 앤드 아스카(CHAGE & ASKA)’ 멤버 아스카였고, 차게 앤드 아스카는 ‘세이 예스’ 등의 히트곡으로 1980~90년대 일본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렸으며, 이 공연이 김대중 정부의 일본 문화 개방 정책에 따른 일본 가수의 첫 대형 내한 콘서트였고, 그들에겐 도박 같은 모험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이들이 활동을 6개월여 멈추고 콘서트 준비에만 몰두했고, 전세기 타고 따라온 일본 팬들이 콘서트장을 대부분 채웠는데도 한국어로 진행했으며, 콘서트 수익은 한국여성재단에 전액 기부하고 떠났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 그럼에도 한국은 시큰둥했고, 일본에선 뻘짓하더니 꼴 좋다고 비난받는 사이에 인기가 급락해 소속사가 문 닫고 밴드마저 해체했다는 사실 역시 나중에 알았다.

24년 전 그날, 이수현씨가 철로로 뛰어들면서 “한일 우호 증진을 위해 내 한 몸 희생하겠다”고 마음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눈앞에 사람이 있었고, 그를 위해 용기를 냈다. 차게 앤드 아스카의 내한 공연에도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의 설득이 있었다지만, 음악만큼은 역사의 굴레를 뛰어넘는 길을 내고 싶다는 그들의 의지가 가장 컸을 것이다. 이런 진심들이 모여 남루했던 신오쿠보 뒷골목이 청춘의 거리로 변모하고, 일본 드라마와 K팝이 물 흐르듯 소비되는 새 시대가 열렸다.

“우리들이 그래도 그만두지 않는 건/꿈의 오르막을 올려다보며/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야.” 아스카가 25년 전 눈물을 삼켜가며 불렀던 ‘온 유어 마크’ 가사의 일부다.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는 꿈의 오르막이었고, 우리는 반일 죽창가나 혐한 헤이트스피치에 굴하지 않고 이만큼 올라왔다. 광복 80주년이자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엔 더욱 힘차게 올라가보자. 정치가 든든한 뒷심이 되어주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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