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 표지판은 아주 단순한 기호와 숫자로만 이뤄지는 것이 이상적이다. 운전자의 시야에 순식간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표시인 데다, 순간의 사고가 목숨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에 오해의 여지를 가능한 한 줄여야 한다. 지구상 어디에서든 교통 표지판은 일종의 만국 공용어다. 유럽에서 마주친 표지판들 역시 우리 도로 어디에 가져다 놓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독일의 어느 골목길에서 나는 한국 도로에서는 보지 못하던 파란 표지판과 마주쳤다. 파란 바탕에 느리게 걷는 어른, 공놀이를 하는 아이, 작게 표현된 차량, 보도 턱을 나타낸 듯한 곡선, 작은 집이 하얀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골목길 모습을 상형한 표지판. 무슨 지시인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이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 기호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릴 적 길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길에 주차된 차량 차주들에게 자주 혼났다. 공에 맞으면 차량이 파손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따로 놀 곳이 없던 나와 친구들은 몰래 눈치를 보며 공놀이를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어린이보다는 차주들의 이동성이 용이하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하니 저 표지판이 무슨 뜻인지 느낌이 왔다. 길은 본래 ‘만남’ 구역이고 그 속도, 힘, 크기, 행동이 서로 극히 다른 행위자들이 서로 얽히는 공간이라는 것. 그리고 그 공간에 진입하려면 운전자는 차량의 주변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 표지판은 단지 추상적인 기호를 넘어, 눈 돌려 주변을 살펴보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눈을 돌리면 어린 시절의 나와 같이 길을 자신의 맥락에 맞게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보일 것이고, 그들을 가능한 한 방해하지 않기 위해 운전자는 속도를 늦출 것이었다. 이 표지판은 철학에서도 활용되고 있었다. 이졸데 카림이라는 오스트리아 현대 철학자는 바로 이 ‘만남 구역’이 서로 이질적인 각각의 개인이 만나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법의 한 모델이 된다고 갈파했다.
이 표지판은 서울에도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우연히 조우한 이 표지판은 아쉽게도 운전자나 보행자의 눈높이보다 한참 올라간 위치에 있었다. 서로의 맥락을 두 눈으로 살펴보며 공공의 공간을 활용하는 지혜 역시 아직은 조금 어정쩡하다는 뜻이 아닐까. 표지판을 채 보지 못했는지 시속 40km를 넘는 속도로 차량이 내 옆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