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우리 부부는 유럽 역사·문화 답사의 대장정에 올라 만 5개월 동안 자동차를 몰고 20국 120여 도시를 돌았다. 서구를 지배하던 ‘중세적 보편성’의 자취와 단일 질서의 역사적 흔적들에 대한 호기심이 우리를 추동한 것. 문헌학도인 나는 늘 서재를 벗어나 현장을 경험하고픈 욕망에 시달린다. 대부분 자잘한 결실들뿐이나, 예상외의 낙수(落穗)들이 적지 않았음은 유럽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서부 코블렌츠 교외에서 ‘치머 프라이(빈방 있음)’란 표지를 보고 들어가 이틀간 묵은 민가. 첫날 아침 식당으로 내려가니, 주인 남자가 낡은 지도책을 들고 와 손톱만 한 한반도를 손끝으로 짚었다. “당신들의 나라 코리아는 이곳을 말하는가?”라고 물었다. 전날 체크인 때 기록한 ‘KOREA’에 큰 호기심을 가졌던 듯했다. 오죽하면 창고 깊숙이 넣어두었음직한 지도책까지 꺼내들고 우리가 식당에 내려오기만 고대하고 있었을까. 책으로만 접해온 유럽 문명의 실상을 보고 느끼기 위해 찾아온 대한민국 학자 부부임을 강조하자, 그러냐고 응답하면서도 머리를 갸웃했다. ‘가난한 분단국 주민이 차를 몰고 독일 등 유럽 일대를 여행하는 일이 가능하냐?’는 의문이 그 표정의 참뜻이었으리라.

길거리에서도 당시 유럽인들은 우리를 보고 열에 여덟은 ‘야뽕’ 아니면 ‘야판’이냐 물었다. 어떤 녀석은 지나면서 ‘곤니치와!’를 외쳤고, 식사 뒤 계산을 끝내면 식당 주인은 ‘사요나라!’로 작별 인사를 건넸으며, 기념품점 아줌마들은 ‘아리가토’를 연발하면서 우리의 환심을 사려 했다. 매번 코리안임을 강조할 수도 없었다. 궁벽한 곳에 가도 중국 식당 하나쯤은 있었으나, 삼성과 LG, 현대를 빼면 우리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표지들은 없었다.

그 사이 우리에 대한 서구인들의 인식 변화는 놀랍다. 앞에 K자를 붙인 문화예술·무역·방산(防産) 등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분야들 덕분이리라. 그것은 시간이 알아서 이루어준 결과가 아니다. 명민함과 노력, 부단한 학습의 결실이다. 이제 한국의 여행객에게 “남이냐 북이냐?” “어떻게 이곳으로 여행 올 수 있었느냐?” 등 촌스러운 질문을 던지는 유럽인들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