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교육부가 ‘영유아 사교육비 시험조사 결과’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영유아 자녀를 둔 부모 1만324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였는데, 내용이 다소 충격적이다. 전국 5세 어린이의 81.2%, 4세 어린이의 68.9%가 각종 사교육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 것.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조사가 이뤄진 3개월간 지출된 전국 6세 미만 영유아 172만여 명의 사교육비는 8154억원으로 추산됐다. 연간으로 환산하면 3조3000억원에 달하는 규모다.
이날 ‘영유아 학원 공화국’의 현실이 구체적인 숫자로 정리된 자료를 보면서 2000년대 초반, 경남 거제에서 보냈던 내 유년 시절을 떠올렸다.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모래 놀이터에서 개미와 공벌레를 잡으며 놀았던 날, 방구차(소독차) 뒤를 쫓아다녔던 오후,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 놀다가 넘어져 울었던 것 등. 어렵사리 생각난 이 추억들이 전부다. 반면 어떻게 한글을 뗐는지 공부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대도시가 아니어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서울 출신 또래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다. 영유아 시절의 공부를 기억하는 친구들은 보지 못했다.
영유아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도 한번 생각해보시라. 기자처럼 기억이 잘 안 날 것이다. 떠오른 기억도 한글과 더하기 빼기를 어떻게 익혔고 응용했는지보단 뛰어놀던 시간이지 않을까. 지금 아이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몇 안 되는 추억이 노란색 학원 버스에서 피곤했던 순간들뿐이어도 괜찮은가?
육아정책연구소와 이화여대 산학협력단이 지난해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영유아 사교육은 아이의 언어 발달과 어휘력 활용 등에 큰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영유아 시절 학습 사교육을 많이(6개 이상) 받은 아이는, 적게(0~1개) 받은 아이에 비해 자존감 평균 점수가 10점 이상 낮았다. 부모들이 3조3000억원이라는 돈을 써도, 아이들에겐 기억나지 않고 오히려 정서적 악영향만 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사교육 열풍은 대학 입시와 직결돼 있다. 유명 영어 학원 입학 레벨 테스트인 ‘7세 고시’가 인기인 이유는 영어가 특목고·자사고 및 대학 입학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초등 의대반’은 의대에 자녀를 입학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노리고 만들어졌다. 대입 제도 전반을 뜯어고치지 않고선 사교육 열풍을 잠재우긴 어렵다.
하지만 대입은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는 영역. 이에 교육계 일각에선 “유아와 초등학생만큼은 사교육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라도 먼저 만들어야 한다”며 ‘사교육 해방 국민투표’를 외치는 목소리도 있다. 최근 한 시민단체는 7세 고시를 아동 학대로 규정해 달라는 진정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아이의 ‘영재적 모멘트’를 찾아 빠르게 대입을 준비하라고 부추기는 사교육 전쟁. 누군가는 멈춰야 한다. 영유아 사교육에 제동을 걸 움직임이 빨리 시작됐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