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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상훈

네덜란드 항해사 하멜이 남긴 ‘하멜 표류기’엔 세상과 단절된 17세기 조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하멜은 조선이 ‘태국 너머로는 가본 적도 없고 태국보다 멀리서 온 외국인과 교류해본 경험도 없다’고 썼다. 19세기 말 나온 ‘은둔의 나라, 코리아’나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 등도 한결같이 조선의 폐쇄성을 강조했다. 조선인이나 서양인이나 서로 너무 낯설었다.

▶신생 한국에 1955년 6월, 프랑스 국적 유람선을 타고 31명이 입국했다. 첫 외국인 단체 관광이었다. 첫 ‘한국 방문의 해’였던 1961년 방한 외국인은 1만1000명이었다. 지금은 연간 1000만명을 넘는다. 한류 드라마·영화·K팝 팬들이 곳곳을 누빈다. 서양인만 보면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하던 나라가 외국인이 지나쳐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나라가 됐다.

▶세계적 셀럽(명사)들도 수시로 한국을 찾는다. 과거엔 일본 가는 길에 잠시 들러 공연이나 판촉 행사만 했다. 지금은 행사 후 며칠씩 머물며 패션 매장과 맛집 등을 찾아다닌다. 먹자골목을 산책하다가 거리에서 만난 팬들과 셀카도 찍는 할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는 한국 팬들 사이에서 ‘톰 형’ ‘진짜 동네 형’ 등으로 불린다. SF 영화 ‘듄2′로 유명한 배우 샬라메, 축구 스타 베컴, 지난달 고척돔구장에서 열린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개막전에 나선 선수들도 서촌 카페, 광장시장 등을 찾아 삼겹살과 호떡을 먹었고 소셜미디어에도 그런 모습을 자랑삼아 올렸다.

▶가상화폐 이더리움을 만든 비탈릭 부테린도 ‘한국 길거리의 셀럽’ 대열에 합류했다. 국내 블록체인 행사에 참가한 그는 지난달 30일 판교 거리를 반팔 차림으로 걸었다. 그저 서울을 찾은 수많은 외국인 중 한 명 같았다.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장면이 인터넷에 오르자 그제야 ‘이재용보다 돈 많으신 분이 동네 작은 카페에서 커피 다섯 잔 주문해서 마시는 게 신기하다’는 반응이 떴다.

▶댓글 중에 ‘카페에 갔는데 이 아저씨 만날 확률은?’이란 질문이 있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그 가능성은 거의 0%였다. 지금은 머스크나 저커버그를 카페에서 봐도 이상하지 않다. ‘은둔의 나라’를 쓴 그리피스 목사는 ‘조선이 지금은 비록 금단의 땅이지만 이 마지막 은둔 국가가 빛나는 진보의 길로 들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때는 누구도 그럴 거라고 믿지 않았다. 그런데 책이 나오고 140년이 흐른 지금, 한국 길거리를 세계 최고 갑부가 그냥 행인으로 걸어 다니는 나라가 됐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땀흘려 남기신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