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의회는 처칠의 80세 생일에 초상화를 선물로 주기로 하고, 화가 그레이엄 서덜랜드에게 그림을 맡겼다. 서덜랜드는 여러 번 처칠을 만나 스케치를 했다. 그림이 공개된 날, 참석자들은 박수를 쳤지만 처칠의 표정은 어두웠다. 처칠은 “사실적이라서 잔인하다. 악의적”이라며 화를 냈다. 서덜랜드는 “사실대로 그렸다고 비난해선 안 된다. 나이를 먹는 건 잔인한 것”이라고 맞섰다. 이 초상화는 의회 대신 처칠의 집 지하실로 들어갔다. 건재함을 과시하려던 처칠의 오산이었다.
▶사진이 없던 시절, 초상화는 권력자들의 것이었다. 왕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 한다. 조선의 왕 27명 중 19명이 어진을 남겼지만 이 중 남아있는 어진은 태조, 세조, 영조, 철종 4명뿐이다. 임진왜란과 1954년 부산 창고 화재로 어진 대부분이 불탔다. 태조 이성계 어진을 보면 꽤 사실적이다. 후대에 우리가 그린 어진은 그렇지 않다. 1973년 이순신에 이어 정부가 지정한 표준 영정 2호가 세종이고 이게 만원권에 들어있다.
▶역대 대통령들도 초상화를 남겼다. 공식 초상화는 임기 1년 정도 남았을 때 대통령이 직접 화가를 지정해 그린다. 화가 한 사람이 전두환, 김대중, 이명박 대통령 초상화를 그렸다. 전 대통령 모발을 풍성하게 그린 이유에 대해 화가는 “머리숱이 더 많았을 때를 상상해 그렸다”고 했다. 이 화가는 10·26 다음 날 박정희 대통령 영정을 의뢰받아 일주일 밤을 새워 완성한 사람이다. 그는 카터 대통령, 카다피, 브루나이 국왕 초상화도 그렸다. 기업들이 그들에게 줄 선물용으로 의뢰한 그림이었다.
▶일반인들은 그림은 언감생심이고 사진뿐이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을 갖긴 어렵다. 늙으면 젊어 보이고 싶고, 험한 인상이면 부드러운 인상을 원한다. 작은 눈은 크게 하고 싶고, 낮은 코도 세우고 싶다. 그래서 포토샵(뽀샵)이다. 여권이나 비자 등 공식 서류에는 과도한 뽀샵을 금지하고 있다.
▶나도 뽀샵 사진 아닌 초상화를 갖고 싶다는 욕구를 채워준 건 인공지능(AI)이었다. 오픈 AI의 이미지 생성 모델에 자기 사진을 올리고 어떻게 그려달라고 하면 된다.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 같은 명작을 만든 작업실 ‘지브리’의 화풍(畵風)이 인기다. 지브리 그림은 색감과 선이 부드럽다. 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면 누구나 선하고 예쁘게 보인다. 지브리 세상에선 악당마저 착하다. 그래서 프사(프로필 사진)로 인기다. 내 마음에 드는 내 얼굴 그림을 AI가 만들어주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