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유럽에는 중국인이 서구 백인 사회를 파괴할 것이라는 ‘황화론(Yellow Peril)’이 퍼졌다. ‘중국인은 악마 숭배자’ ‘중국 여성이 전염병의 숙주’ ‘중국 상점은 범죄 소굴’ ‘청나라가 쳐들어와 백인을 대체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근거 없는 편견이었지만 과거 유럽을 휩쓴 훈족과 몽골에 대한 공포감을 타고 들불처럼 번졌다. 미국에선 ‘중국인 배척법’이 나왔고, 청나라풍 만화 캐릭터인 ‘후만추’는 악당의 전형이 됐다. 그런데 이 소동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용을 탄 부처상이 침략하는’ 꿈을 꾼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중국이 ‘G2’로 부상하면서 ‘차이나 공포증’이 되살아났다. 코로나는 혐중 괴담에 기름을 끼얹었다. 국내에서도 ‘중국의 생물학 무기이자 시진핑의 국제적 기획 범죄’라는 등의 소문과 영상이 돌았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엔 중국발 부정선거론이 번졌다. ‘비상계엄 당일 선관위 연수원에서 체포된 중국인 99명이 미군에게 조사받고 부정선거를 자백했다’ ‘2020년 코로나 때도 중국인이 선관위에 머무르며 총선에 개입했다’ ‘탄핵 찬성 집회에 중국인이 조직적으로 참가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부 유튜버는 ‘경찰 내부에 중국이 침투했다’고 주장했다. 근거로 ‘CN1400’이라는 경찰 깃발 사진을 제시했지만 이는 ‘충남’의 약자였다. 일부에선 ‘화교는 특례로 서울대 의대에 쉽게 진학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화교 출신은 없다. 중국이 우리 기업·언론 등을 사실상 소유·장악했다는 주장도 나돈다.
▶최근 산불에도 중국 음모론이 번졌다. ‘중국인이 산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산불 현장에서 라이터가 발견됐는데 중국산이라는 이유였다. ‘방화한 중국인 간첩이 붙잡혔다’거나 ‘중국 관련성이 있으면 주한 미군이 투입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의성 산불은 성묘객의 실화로 추정되고, 중국산 라이터는 어디서든 구입할 수 있다. 결국 주한 미군이 나서서 “가짜 뉴스”라고 발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음모론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간 중국이 보여온 오만하고 불합리한 행태 탓이 크다. 사드 보복에 ‘3불(不)’을 강요하고 서해 구조물 설치 등으로 우리 주권을 위협했다. 세계 50여 나라에서 비밀 경찰서를 운영하고 각종 해킹 의혹도 받는다. 이 때문에 혐중 정서가 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산불에까지 중국을 끌어들이는 건 도가 지나치다. 의혹을 제기하려면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혐중 정서에 기댄 마구잡이 음모론은 외교 갈등을 일으키고 국격만 떨어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