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대기업 임원으로 승진한 대학 동창을 축하해 주려 만났는데 의외로 얼굴빛이 어두웠다. 자기보다 앞서 별을 단 선배들이 2~3년 뒤 대부분 잘렸다며 “나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임원 승진 2년 뒤 옷을 벗었다. 위로해 주려고 만났더니 “승진에 목매지 말고 요즘 후배들처럼 요령 피우며 회사 다닐 걸 그랬다”고 푸념했다.
▶승진을 최고의 훈장으로 여기던 시대가 가고 있다. 오히려 보스(boss)가 되기를 기피하는 언보싱(unbossing)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승진을 포기했다고 해서 ‘승포자’, 어른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과 같다고 해서 ‘오피스 피터팬’으로도 불린다. 기업체에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학교에선 교장 되기를 포기한 교사를 ‘교포’, 군에선 장성 진급을 포기한 대령을 ‘장포대’라 한다.
▶한 헤드헌팅 회사가 직장인들에게 승진에 대한 생각을 물었더니 ‘임원까지 승진하고 싶다’(45%)보다 ‘승진하고 싶지 않다’(54%)가 더 많았다. 승진 포기 이유는 더 의외였다. ‘책임지는 자리에 가기 싫어서’(43%)와 ‘승진하면 일과 삶을 조화롭게 병행하는 게 불가능하다’(13%)가 절반을 넘었다. ‘능력이 안 돼 승진을 포기했다’는 20%였다. 관리직 맡을 사람을 외부에서 수혈하는 ‘상사 대행’ 현상까지 빚어진다.
▶젊은 세대의 승진 기피가 단지 ‘편한 삶’을 지향해서만은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근본적으로는 승진의 효용이 전만 못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전에는 승진하면 오른 급여로 집을 장만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급여가 집값 상승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니 진급 바라며 인생을 회사에 바치기보다 짬을 내 재테크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취미나 ‘투 잡’ 알바에 대한 높아진 관심도 이런 세태 변화를 반영한다. 인사 철만 되면 공인 노무사에게 “승진 발령을 거부할 방법 좀 알려 달라”는 직장인 문의 전화도 쇄도한다.
▶코로나 사태 이후 화상 회의와 원격 근무를 경험한 신세대 직장인들은 조직에 대한 충성심도 선배 세대보다 약하다. 서로 자주 볼 일 없으니 선후배 간 유대 의식도 전보다 옅어졌다. 전 부서원이 밤늦도록 술 마시다가 차가 끊겨 부장 댁에 자러 갔더니 사모님이 직원들 칫솔과 양말까지 준비해 놓고 맞이하더라는 무용담은 과거지사가 됐다. 업무에 대한 헌신을 이끌어냈던 승진 중심의 보상 체계가 흔들리면서 기업들도 고민에 빠져 있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지 않고 리더를 부러워하지 않게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