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로스의 하프 연주자, 기원전 2700~2300년경, 대리석, 높이 22.5cm,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소장.


의자에 앉아 하프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남자의 대리석 조각이다. 납작한 타원형에 코만 솟아오른 얼굴은 20세기 초 화가 모딜리아니의 단순한 인물화나 브랑쿠시의 추상 조각을 닮았다. 매끈한 원통형만으로 유연한 팔, 우아한 의자 곡선, 박자에 맞춰 발끝을 까딱대는 듯 생동감 있는 연주자의 분위기를 표현한 걸 보면 피카소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조각이 현대미술을 닮았다는 건 완전히 틀리는 말이다. 사실은 현대의 미술가들이 이를 모방해왔기 때문이다.

추상 조각의 원조 격인 이 조각은 지금부터 5000년 전, 케로스섬에서 만들어졌다. 케로스는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 사이 에게해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키클라데스 열도 중 하나다. 어떤 섬에서든 최소한 다른 섬 하나는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서로 가까운 키클라데스 열도는 기원전 3000년경 청동기 시대부터 인접한 그리스나 크레타와는 다른 독자적 조형 언어를 만들어냈다. 그중 이처럼 극도로 단순한 형태의 대리석 인물상은 작게는 수 센티미터짜리부터 크게는 1미터가 넘는 것까지 다량 발견됐는데, 채색이 남은 상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처럼 단순한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키클라데스 인물상 대부분은 솟아오른 가슴 아래로 두 팔을 가지런히 모은 여성상인데, 이 하프 연주자는 남성임이 분명한 희귀한 사례다.

불행히도 이 상을 만든 목적은 알 수가 없다. 무분별하게 도굴한 탓에 19세기 말에 처음 발견할 때부터 치밀한 고고학적 조사가 불가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인형이라 하고, 누군가는 신상(神像)이라 하며, 또 누군가는 그 중간쯤의 귀한 물건이라고 했을 뿐이다. 과연 이 남자는 누구를 위해 이토록 우아한 자태로 연주한 것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