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바사노, 가을, 1580년대, 캔버스에 유채, 78x103cm, 개인소장.

‘젊은’ 프란체스코 바사노(Francesco Bassano the Younger·1549~1592)는 유서 깊은 화가 집안의 자손이었다. 할아버지 프란체스코와 아버지 야코포가 대대로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바사노 델그라파에서 화가로 활동하며 명성을 쌓았다. 야코포의 네 아들이 모두 화가로 성장해 가업을 이었는데 그중 장남인 ‘젊은’ 프란체스코가 가장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가을’은 사계절의 노동을 그린 연작 중 한 편인데, 바사노 집안의 대표 상품으로 특히 인기가 많아 유화로도 여러 점이 남아있고, 후대에는 판화로 제작되어 널리 유통됐다. 산 너머로 해가 떨어지는 저녁인데 농사일에 여념이 없는 이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고도 힘이 넘친다. 오른쪽 남녀는 포도를 따고, 그 옆의 여인은 광주리 둘에 포도를 가득 나눠 담았다. 허벅지까지 옷을 들어 올린 소년이 들통에 들어가 포도를 짓이겨 밟는 중이고, 황소 두 마리는 달구지를 매달고서 얌전히 출발을 기다린다. 젊은 여인이 무릎을 꿇고 포도즙 맛을 보는데, 소달구지에 실린 거대한 오크 통에는 나중에 포도주로 숙성될 포도즙이 가득 찼을 것이다. ‘그림의 포도’가 어찌 이리 먹음직한가. 그런데 왼쪽 뒤의 산 위에서는 하나님에게 십계명을 받는 모세가 보인다. 당시에는 포도주가 그냥 술이 아니라 예수의 피를 상징한다는 기독교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풍속화 속에 성경 장면을 끼워 넣는 게 관습이었다.

불행히도 ‘젊은’ 프란체스코는 우울증이 심했다. 1592년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결핵을 앓게 된 그는 창밖으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촉망받는 화가에게 그림이 무거운 족쇄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