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 애슐리 비커튼(Ashley Bickerton·1959년생)은 영국인으로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유럽어가 중남미에 전파되며 파생한 크리올 언어 등을 통해 초보적 언어 발생 과정을 연구한 저명 언어학자였다. 덕분에 비커튼은 여러 대륙을 옮겨 다니며 성장했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대학을 나온 뒤 1980년대에 뉴욕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인도네시아 발리에 거주한다.
삼성전자의 옛 로고가 반가운 이 작품은 ‘고뇌의 자화상’이다. 부제는 ‘아를의 수지’. 수지는 비커튼의 예명이지만, 남프랑스 아를에서 고뇌에 찬 자화상을 남긴 미술가라면 비커튼에 앞서 빈센트 반고흐가 먼저 떠오른다. 19세기 말의 반고흐가 강렬한 색채로 혼란스러운 내면을 표출했다면, 20세기 말 비커튼의 자아를 보여주는 건 그의 일상을 가득 채운 온갖 상품이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 말끔한 알루미늄과 고무, 플라스틱 등으로 이루어진 패널 위에는 우리 눈에도 익숙한 글로벌 기업의 로고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비커튼을 만나본 적도 없는데, 그가 삼성 TV를 보고, 르노 자동차를 타며, 말버러를 피우고, 클로즈업 치약으로 양치하고, 시티뱅크와 거래하며, 바이엘사의 약을 복용하는 사람이었단 걸 한눈에 알아보다니 놀랍지 않은가. 20세기 후반이면 이미 바베이도스에서 태어나 지구 곳곳을 누비며 살아온 한 개인의 특별한 인생도 전 세계인이 알아보는 상표 몇 개로 요약되는 시대였던 것이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감각적인 노란색 타이포그래피로 디자인한 ‘수지(Susie)’는 말하자면 작가의 상표인 셈이다. 비커튼은 이처럼 사람과 상품이 모두 브랜드화한 사회에서 개인의 의미를 질문했다.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