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다양한 음모론을 믿는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세계는 유대계 갑부가 지배하고 있고, 미국의 진보 정치는 그들의 어젠다를 따른다’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음모론이 그렇듯 사실과 거리가 멀지만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존재한다. 가령 20세기에 이름을 날린 천재 투자자 조지 소로스가 그렇다. 1992년 영국의 금융 위기였던 ‘검은 수요일’에 영국의 파운드화를 쇼트(투매)해서 ‘영국은행을 파산시킨 사나이’로 유명한 그는 오픈소사이어티재단을 설립해 각종 진보적 어젠다를 후원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에 큰돈을 후원했다. 이런 배경이 그를 보수 유권자들이 미워하는 갑부 1위로 만들었다면, 반대편에는 코크 형제가 있다.
찰스 코크와 2019년에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코크 형제는 미국의 10대 갑부 리스트에 나란히 등장했던 기업인들이다. 그들의 회사인 ‘코크 인더스트리’는 대부분 공업용 자재를 거래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알지 못하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엄청나서, 수많은 공화당 정치인들에게 후원금을 주면서 자신들 어젠다에 서약하게 했다.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을 신봉하는 코크 형제는 각종 세금과 규제 철폐는 물론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정부 정책에도 반대해 진보 진영의 분노를 사며 ‘공적 1호’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지난 20세기에 부자가 된 사람들이다. 정치인들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여전하지만, 소셜미디어가 등장하고 그 힘을 잘 이용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정치적 영향력의 개념이 많이 달라졌다. 우선 미국에서 부의 지형이 변했다. 현재 미국 최고의 갑부 10명 중 8명이 테크 기업 창업자들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출발한 이들은 공화당, 민주당으로 구분되지 않고, 과거 갑부들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치인들을 돈으로 후원하고 원하는 어젠다를 건네는 방식에 만족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전통적으로 친기업적인 공화당 세력이 힘을 잃었다. 부시 가문으로 대표되는 ‘정통 보수’는 새롭게 등장한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사실상 당을 빼앗겼고, 그들을 지지하던 코크 형제 같은 부자들은 당황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테크 기업에서 성공한 21세기 갑부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페이팔의 공동 창업자 피터 틸이다. 페이스북의 초기 투자자로도 유명한 그는 페이팔 이후 헤지펀드로 큰돈을 벌었고, 빅데이터 분석 소프트웨어 기업인 팰런티어를 만든 테크 갑부로, 흔히 진보적인 성향이라고 알려진 실리콘밸리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2016년 대선 때 트럼프를 공개 지지해서 화제가 된 인물이다.
최근 나온 책 ‘콘트래리언(The Contrarian)’은 틸이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고, 반드시 보복을 하기 때문에 주위에서 다들 두려워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공개한 온라인 매체 고커(Gawker)에 소송을 걸어 파산시킨 이야기는 유명하다. 틸이 원래 민주당 어젠다를 싫어할 뿐 아니라, 모든 정치인과 정부 조직 자체를 불신하기 때문에 트럼프에게 끌렸다는 말이 있지만, 어쨌거나 현재 트럼프 지지 세력과 연결된 유일한 테크 갑부다.
그런가 하면 같은 실리콘밸리에서 세계 최대의 고객 관리 설루션 기업인 세일스포스를 만들어 키운 마크 베니오프는 틸과 비슷한 나이(50대)이지만 전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다. 베니오프는 틸이 트럼프를 지지한 2016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힐러리를 지지했을 뿐 아니라, 남성 중심의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가진 젠더 문제 해결에 목소리를 높이는 진보 남성이다. 특히 2015년에는 (훗날 트럼프의 부통령이 되는) 마이크 펜스 인디애나 주지사가 성 소수자를 차별하는 정책을 추진하자 “세일스포스를 인디애나주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위협해 철회하게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베니오프는 “페이스북은 담배 회사와 똑같다”며 폐해를 지적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최근 내부자 폭로로 이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견해지만, 베이오프가 몇 년 전 이 말을 했을 때만 해도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들끼리는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는 ‘침묵의 카르텔’을 깼다고 박수를 받았다. 반면 피터 틸은 트럼프 당선 직후 페이스북의 CEO 마크 저커버그와 트럼프의 회동을 주선했다. 그 결과인지 페이스북은 트럼프 재임 기간 내내 트럼프와 지지자들의 가짜 뉴스를 단속하지 않고 놔두었는데, 앞서 언급한 책에 따르면 저커버그의 이런 결정에도 틸이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실제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얼마 전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주지사에 대한 소환(recall) 선거가 있었다. 넷플릭스 CEO와 저커버그 부부 등 많은 테크 갑부들이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각 진영에 엄청난 돈을 기부했다. 우리 돈으로 약 3500억원이 들어간 소환 선거의 결과는 부결이었고, 개빈 뉴섬 주지사는 직을 유지했다. 큰돈과 시간, 정치적 에너지를 낭비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이 선거를 두고 미국인들은 갑부들이 현실 정치에 정말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서 “21세기 정치에서는 소셜미디어의 영향력이 돈의 힘을 눌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요 소셜 플랫폼에서 퇴출당한 채 2024년 대권에 재도전하는 트럼프가 당장 후원금 모금보다 소셜미디어 기업을 직접 창업하는 데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도 몰라보게 위상이 높아진 소셜미디어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