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영국 음악가 랠프 본 윌리엄스가 탄생한 지 150주년 되는 해다. 1872년 영국 태생 본 윌리엄스의 음악은 국내에서 그리 자주 연주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의 바이올린 곡 ‘종달새의 비상’은 김연아가 지난 2007년 세계 피겨선수권 프리스케이팅 음악으로 선택한 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 윌리엄스를 단지 ‘종달새의 비상’ 작곡가로만 기억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 윌리엄스는 베토벤처럼 훌륭한 교향곡을 아홉 곡 썼을 뿐 아니라 오페라와 영화 음악에도 뛰어났으며, 체코의 스메타나와 핀란드의 시벨리우스처럼 조국의 음악을 부흥시키고자 애썼던 국민주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는 항상 영국적인 음악에 대해 고민했다.

1903년 겨울, 영국적인 음악을 찾고자 했던 본 윌리엄스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에섹스의 한 마을을 지나다가 우연히 늙은 목동이 부르는 소박한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 단순한 민요 속에는 영국인들이 무의식적으로 형성해온 영국 음악의 뼈대가 살아 있었다. 늙은 목동의 노랫소리에 빠져든 본 윌리엄스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당시 영국은 산업화가 빨라지면서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는 바람에 시골에는 대부분 노인만 있었고 그 노인들이 죽으면 민요도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위기의식이 든 본 윌리엄스는 그때부터 영국 민요를 발굴하는 ‘음악의 고고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1903년부터 1913년까지 에섹스, 서섹스, 노포크 등 영국의 여러 지역을 누비며 민요를 수집했다. 그렇게 해서 모은 영국 민요가 800여 곡이나 됐다.

/일러스트=이철원

본 윌리엄스의 오랜 민요 연구 성과는 여러 작품을 통해 나타났다. 노포크에서 수집한 민요를 바탕으로 한 ‘노포크 랩소디’를 비롯해 ‘소택지에서’ 등 여러 작품으로 영국의 주요 작곡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청중과 비평가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본 윌리엄스 자신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는 비평가들의 찬사에 현혹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음악이 재미없고 딱딱하다고 느꼈다.

1908년, 이미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은 36세의 본 윌리엄스는 돌연 파리로 향했다. 프랑스의 세련된 음악에서 뭔가 배울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자기보다 세 살 어린 데다 아직은 유명하지 않았던 프랑스 작곡가 라벨을 찾아갔다. 라벨은 예상치 못한 방문에 무척 당황했고, 처음에 두 사람 사이에는 약간 오해가 있었다. 하지만 두 음악가는 곧 서로 호감을 갖게 되어 본 윌리엄스는 일주일에 4~5일씩 라벨을 찾아가서 한 번에 몇 시간씩 레슨을 받았다. 성실한 태도로 라벨의 수업을 받은 중년의 본 윌리엄스는 라벨의 영향으로 오케스트라를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라벨이야말로 내가 찾던 사람이다. 그는 색채 면에서 오케스트라를 다루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썼다.

이후 본 윌리엄스의 진정한 대표작이 쏟아졌다. 런던의 소리가 담긴 ‘런던 교향곡’, 영국 시골 분위기가 담긴 ‘전원 교향곡’, 튜더 왕조 시대의 음악가 토머스 탈리스의 성가에서 영감을 받은 ‘토머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등 걸작이 연달아 탄생했다. 이 작품들은 영국적 소재로 된 곡이지만 라벨의 영향이 담긴 프랑스풍의 색채감 있는 오케스트라 음향 덕분에 영국식 선율은 더욱 빛을 발한다.

남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내면의 등불을 따라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본 윌리엄스는 말년에 이르기까지도 이런 삶의 태도를 견지했다. 1951년에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초연한 그의 오페라 ‘천로역정’이 실패하고 설상가상으로 아내까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본 윌리엄스는 전혀 흔들림 없이 “나는 은자도 되지 않을 것이고 어떤 계약도 취소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는 ‘남극 교향곡’을 완성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노인”이라 불렀지만 그는 자신이 “위대하지도 않고 노인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그리고 1958년 8월 26일, 86세에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의 책상 서랍에는 새로운 오페라 초고가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