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호, 찬양받지 못한 설립자들을 위한 기념비, 2004년, 돌과 청동, 53.3×320㎝, 채플힐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소재. /ⓒ서도호

지난 2018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광장에 서있던 남군(南軍) 기념 동상 ‘침묵의 샘’은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군중 손에 강제 철거됐다(본 칼럼 2021년 3월 30일 A35면). 1913년 건립 당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던 이 상은 1960년대 흑인 인권 운동이 일어나며 시시때때로 문제시되기 시작하다 마침내 사라진 것이다.

같은 광장 맞은편에 한국 미술가 서도호(60)의 ‘찬양받지 못한 설립자들을 위한 기념비’가 나지막이 서있다. ‘찬양받지 못한 설립자들’이란 해방 전까지 남부의 경제를 지탱했던 흑인 노예들을 일컫는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역시 1786년 미국 최초의 공립대학으로 설립된 이래 최고의 명문 대학으로 성장하기까지 그 밑바닥에 노예들의 노동이 깔려있건만 대학 어디에도 이들의 희생과 슬픈 역사를 되새기는 기념비는 없었다.

2002년에서야 졸업생들이 흑인 노예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기증하기로 결정하고 초청한 작가가 바로 서도호였다. 서도호는 300개의 작은 청동 군상이 두 팔을 높이 들어 떠받드는 검은 화강암 테이블을 만들고 그 주위에 누구라도 걸터앉을 수 있게 의자를 뒀다. 이는 드높은 기단 위에 홀로 서서 모두를 내려다보는 남군 병사의 동상과 모든 면에서 상반되는 구조다. 땅바닥에 낮게 깔린 테이블 아래에는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닌 수많은 익명의 군중이 힘을 합쳐 고된 운명을 감내하는 모습이 있다. 관람객이 이들을 보기 위해서는 몸을 숙이고 눈을 낮춰 내려다봐야 한다. 작가는 이를 ‘역(逆)기념비’라고 불렀다. ‘침묵의 샘’이 있던 자리는 현재 빈터다. 서도호의 기념비에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꽃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