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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먼 존슨, 내가 두고 온 소녀, 1872년경, 캔버스에 유채, 106.7×88.7㎝, 워싱턴DC 스미스소니언 미국미술관 소장.

황량한 언덕 위에 소녀가 서 있다. 긴 머리가 휘날리고 두꺼운 치마가 부풀도록 역풍이 거센데 그녀는 팔에 걸친 외투가 더는 나부끼지 않도록 발로 꾹 눌러 밟고 먼 광야를 내다본다. 봄인지 가을인지 알 수 없는 계절, 오전인지 오후인지 알 수 없는 시간에, 안개인지 연기인지 모를 희뿌연 공기가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모든 게 불분명한 풍경 속에서 뚜렷한 건 오직 언덕 아래 벌판을 가르는 철책뿐이다.

미국 화가 이스트먼 존슨(Eastman Johnson·1824~1906)은 정치인 아버지를 따라 워싱턴 DC에서 유명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일찍부터 화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뒤셀도르프, 헤이그, 파리 등지에서 미술학교를 다녔고, 특히 17세기 네덜란드 미술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미묘한 명암 효과를 써서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은 네덜란드 미술에서 배웠다.

‘내가 두고 온 소녀’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군인들이 고향에 두고 온 여인을 그리며 부르던 민요다. 존슨은 남북전쟁이 끝난 뒤 이 그림을 완성했다. 역시나 그림 속 소녀의 왼손에서 결혼반지가 반짝인다. 전쟁터로 떠난 군인도, 떠나보낸 여인도 하루하루가 불안하기는 마찬가지겠지만, 가녀린 듯 결연하게 언덕에 선 소녀의 얼굴에서 믿음과 용기가 보인다. 평화가 오리라는 믿음과 그때까지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가 바로 수많은 자국민이 목숨을 잃은 전쟁 이후 필요한 덕목이었던 것이다.

최근 BTS의 제이홉이 입대했다. 전 세계 수천만 명의 팬들을 뒤에 두고. 두고 온 이가 하나든 수천만 명이든 떠나는 발걸음은 똑같이 무거울 터. 기다리는 이들의 믿음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