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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바이든 대통령(좌),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우)

미국은 항상 이스라엘 편을 든다. 예외가 별로 없다. 핵 개발 의혹으로 이란을 고강도로 제재하면서도 이스라엘 핵은 언급조차 안 한다. 공식적 동맹 관계도 아니다. 그럼에도 어느 동맹국보다 가깝다. 전문가들은 이 관계를 ‘인지적 동맹(cognitive alliance)’이라 표현한다. 문서화한 조약도 필요 없는 운명 공동체라는 의미다. 양국은 왜 이렇게 각별할까? 몇 가지 가설이 있다.

그래픽=송윤혜

첫째는 심리적 가설이다. 홀로코스트 초기 미국이 외면했다는 죄책감이다. 1939년 나치의 압박을 피해 미국으로 향하던 유태인 피난민 937명이 탄 세인트 루이스호를 돌려보낸 사건이 한 예다. 돌아간 승객 3분의 1이 학살당했다. 이 심리적 부채를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 요인으로 설명한다. 둘째는 유용성 가설이다. 냉전기 소련의 중동 진출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의 정보 자산이 긴요했다는 것이다. 동유럽과 러시아 출신 유태인 중 지도자급 인사들이 이스라엘 건국의 주역으로 상당수 참여했다. 소련을 상대할 때 이들의 경험과 관점을 활용할 수 있었다는 논리다. 셋째는 영향력 가설이다. 미국 내 유태인 공동체의 영향력을 주목한다. 숫자는 720만명 정도지만 금융, 언론, 학계 등 각 영역에서 이들의 힘은 크다. 로비와 별개로 선거에도 영향을 끼친다. 반이스라엘 노선을 택한 정치인에 대한 유태인들의 낙선 운동은 치밀하다. 자연스럽게 미국 정계는 이스라엘의 국가 이익에 공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는 정체성 가설이다. 두 가지 단면이 있다. 하나는 이민 국가 정체성이다. 핍박을 피한 이주로 만든 나라다. 일종의 ‘약속의 땅’ 서사를 공유한다. 이민 국가라는 독특한 공통점이 유대감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단면은 종교 문화 정체성이다.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은 유대교와 연대 의식이 있다. 이에 바탕을 두어 양국이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어느 한 요인만 들기는 어렵다. 복합적으로 작동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태생부터 미국과 가까웠을까? 아니다. 1948년 건국 즈음 이스라엘은 미국에 골칫거리였다. 당시 조지 마셜 국무장관과 냉전기 봉쇄 정책의 설계자 조지 케넌 등 국무부 핵심 전략가들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스라엘 승인 거부를 건의했다. 전임 루스벨트 대통령이 3년 전 수에즈에서 사우디 국왕을 만나 석유를 확보하고 친미 진영으로 끌어안았던 터다. 만일 미국이 이스라엘 건국을 옹호하면 반미 극단주의가 준동하고, 아랍이 대거 공산 진영으로 갈 수 있음을 경고했다. 반유대주의로 인한 국내 갈등도 우려했다. 반면 백악관에 포진해 있던 유태인과 시온주의 기독교 참모들은 이스라엘 승인을 주장했다. 이 때 위의 가설들을 내세웠다. 백악관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고민하던 트루먼은 결단했다. 국무부의 반발을 물리치고 건국 즉시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트루먼은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다.

건국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불안했다. 트루먼 이후 언제 미국이 이스라엘을 외면할지 몰랐다. 실제로 아이젠하워, 케네디 정부는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여전히 미국은 석유를 가진 아랍을 상대하는 외교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막역한 지음(知音) 관계가 본격화한 것은 한참 후인 닉슨 대통령 때부터다. 1970년대 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스라엘은 미국과 밀착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를 완비했다. 유대교 국가이지만 세속주의가 작동했다. 팔레스타인 문제로 늘 비판받긴 했으나 전반적 인권이나 언론의 자유는 아랍 국가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주목할 만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이스라엘의 대미 공공 외교다. 즉 대중을 상대로 외교를 벌인 것이다. 1969년 이츠하크 라빈(전 총리)이 주미 대사로 부임하면서 그랬다. 특히 종교에 초점을 맞췄다. 당시 베긴 총리와 라빈 대사는 기독교 복음주의 진영의 지도자들을 지속적으로 이스라엘로 초청, 환대했다. 유대교 구약성서의 서사를 신약 기독교의 서사와 접목해 신앙 공동체임을 강조했다. 미국 내 기독교 부흥의 열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절이다. 미국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정부 관계는 정권에 따라 부침이 있을 수 있지만, 미국 국민은 이스라엘을 한 가족처럼 인식한 것이다. 인지적 동맹의 기초다. 이스라엘의 치밀한 전략과 노력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양국 관계는 태생부터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불과 50년 전이다.

그러나 지금 이상 징후가 보인다. 가자 전쟁 때문이다. 작년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직후만 해도 바이든 미 대통령은 “75년 전 이스라엘 건국을 미국이 11분 만에 승인한 순간부터 그랬던 것처럼 미국은 이스라엘을 견고하게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다음 날 미국은 두 항모 전단을 동지중해로 급파하며 이스라엘 편에 섰다. 이스라엘은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무차별 가자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이 피해자였지만 팔레스타인 민간인 사상자가 폭증하면서 국제사회의 반이스라엘 여론이 솟구쳤다. 미국 내 비판 여론도 이례적으로 높아졌다. 특히 민주당 지지자들의 반감이 크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바이든을 비판하며 대선 보이콧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부담을 느낀 바이든의 휴전 요구와 자제 권고를 이스라엘은 듣지 않고 있다. 최근 미국은 이스라엘의 공습을 피해 내려온 가자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위해 라파 국경 지대를 통해 보급로를 확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라파에 대한 공격 의지를 밝히자 백악관과 민주당 지도부는 당혹하고 있다. 네타냐후가 극우 종교 정당 지도자들과 결탁하여 미국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최근 미국 민주당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는 이스라엘 정권 교체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물론 미국과 이스라엘 양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는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이다. 정부 간 갈등은 언제든 있을 수 있고 또 전격적으로 화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의 인식 변화는 회복과 수습이 어렵고 오래 걸린다. 네타냐후 정부는 선배들이 각고의 공을 들이며 쌓아온 외교 노력을 무너뜨리고 있다. 세우기는 어렵지만 허물기는 순식간이다. 불변 동맹처럼 보이는 미국과 이스라엘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