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에 떡갈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사실 한 그루라고 하기에는 큰 가지 대부분이 다 떨어져 나가 허룩하다. 주위에는 뒤틀린 가지들이 뒹굴고 있지만, 모양새를 보니 밤새 온 눈 탓에 내려앉은 것은 아니고, 그저 겨울이 되니 자연스레 말라버린 가지가 하나둘 떨어진 것 같다.
그렇게 새파란 냉기만 남은 대기를 등지고 홀로 섰지만, 결코 초라해 뵈지는 않는다. 가을이 오면 잎이 떨어지고, 눈이 오면 가지가 메마르고, 그렇게 헐벗은 채 혹독한 계절을 견디면, 시나브로 봄이 오고,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걸, 나무가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거장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1774~1840)에게 거대한 떡갈나무는 자연의 상징이자 고향의 은유였다. 프리드리히는 오늘날 독일 동북부의 그라이프스발트에서 태어나 드레스덴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드레스덴은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로서 짧은 번영기 이후에 전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 전쟁에 말려들면서 파괴와 혼란을 피하지 못했다.
고국의 영광과 쇠락을 몸소 겪어야 했던 프리드리히는 천성이 내성적인 데다 어린 시절에 연달아 가족을 잃은 개인적 비극까지 겹쳐, 화가로서 성공을 이루었으면서도 깊은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든 부질없는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던 그에게 눈 속의 떡갈나무는 고향 처지 같았다. 하지만 봄이 오면 어김없이 되살아나는 나무의 섭리는 그에게 소생에 대한 굳건한 희망을 주는 종교나 마찬가지였다.
프리드리히는 사망 이후 망각 속의 화가가 되었다가 19세기 말에야 재발견됐다. 덕분에 작품 대부분은 여전히 그가 사랑한 독일 땅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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