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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번-존스, 창조의 날들: 첫째 날, 1870~6년, 목판에 수채와 과슈, 금박 등, 102.2x35.5cm, 캠브리지 하버드대학교 포그미술관 소장.

19세기 중반, 프랑스 화가 쿠르베는 천사를 그려달라는 교회의 요청을 거부하며, ‘천사를 보여주면 그리겠다’고 했다. 그에게 현실에 없는 존재를 그리는 건 거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같은 시기를 살았던 영국 화가 에드워드 번-존스(Edward Burne-Jones·1833~1898)는 주로 성경, 전설, 신화에 등장하는 천사와 요정을 그렸다.

번-존스의 대표적인 천사 그림이 여섯 폭으로 이루어진 ‘창조의 날들’이다. 그는 창세기에 나온 대로, 신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한 과정을 그리면서, 천사 여섯이 각각 커다란 수정 구슬 하나씩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구현했다. 빛과 어둠을 가른 첫날에는 거대한 날개로 온몸을 감싼 창백한 얼굴의 천사가 흑백으로 나뉜 구슬을 들고, 마치 물 위를 걷는 듯 투명한 바닥에 섰다. 처음 ‘창조의 날들’을 본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천사들의 눈이 지혜와 사랑의 빛을 머금었고, 그들의 날개에는 강인한 힘과 지극한 아름다움이 깃들었다’고 찬미했다.

‘창조의 날들’은 1870년 번-존스의 동업자이자 절친이던 윌리엄 모리스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기 위한 밑그림으로 의뢰한 것이었다. 당시 번-존스는 신랄한 악평을 연달아 받고 전시를 완전히 멈춘 상태였다. 그는 아홉 살이던 모리스의 큰딸 제니를 모델로 천사를 그리기 시작했다. 사랑을 듬뿍 받던 제니는 명문대 입학 허가를 받을 정도로 영민한 아이였지만, 1876년 그림이 완성될 즈음에는 심한 뇌전증으로 부모 품을 떠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번-존스가 쿠르베의 사실주의를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현실을 바라보자니, 천사라도 믿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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