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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광해 15년) 3월 13일(음력) 밤 광해군은 창덕궁 어수당(魚水堂)에서 술에 취하여 변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후 처남 유희분과 외척 박승종이 여러 차례 청하여 마침내 의금부 당상과 포도대장을 부르고 도승지 이덕형, 병조판서 권진을 입직하게 하였다. 도감 대장 이흥립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을 호위하였다. 그러나 실록은 “이흥립은 박승종의 사돈으로 그의 추천으로 이 직을 맡았는데 이때 은밀히 반정군과 합세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반정군(反正軍)이라고 해봤자 오합지졸 포함한 1천 명 정도였다.

반정군이 창덕궁 문밖에 도착했을 때 이흥립은 직접 와서 반정군을 맞이했고 나머지 호위병들은 모두 달아났다. 재상과 대신들도 반정군의 함성 소리를 듣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광해군은 창덕궁 북쪽 후원 소나무 숲으로 나아가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갔다. 젊은 내시가 업고 궁인 한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여 사복시 개천가에 있는 의관(醫官)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 이때도 광해군은 상황 판단을 잘못해 안국신 집안 일꾼 정담수를 시켜 바깥 상황을 살피게 하고는 “혹시 이이첨이 한 짓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여전히 상황 판단을 못 하고 있었다.

정담수가 몰래 나가서 반정군에게 광해군이 숨어 있는 곳을 아뢰었다. 훗날의 인조는 이천부사 이중로를 보내어 광해군을 대궐로 데려오게 하고서 도총부 직방(直房)에 머물게 하였다. 이중로가 광해군을 데려오려 할 때 광해군은 “혼매(昏昧)한 임금을 폐하고 뛰어난 이를 세우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어찌 나인 내시 급사등을 보내주지 아니하여 나를 대우하는 것이 이처럼 박한가”라고 따졌다. 이에 인조가 궁인과 후궁을 보내어 모시게 했다.

반정 세력은 열흘 후인 3월 23일 광해를 강화도에 안치했다. 2025년 1월 15일 새벽과 아침의 일을 지켜보다가 문득 감회가 일어 인조반정 당일과 다음 날 광해군의 행적을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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