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가 연일 화제다. 미국은 적잖은 놀라움을 표시한다. 과학 저널 네이처(Nature)에서 발표한 세계 주요 대학의 과학 성과 지표에서 10위권에 무려 8개의 중국 대학이 포함된 소식까지 더해지며, 이를 소련의 인공위성이 미국을 충격에 빠뜨린 ‘스푸트니크 쇼크’에 비교하기도 한다.
한꺼풀 더 깊게 들여다보니 이번 딥시크 개발을 이끈 주역이 1995년에 태어난 불과 서른 살의 여성 프로그래머였다는 사실이 큰 관심을 끌었다. 여성 과학자가 적은 우리나라로서는 생각해 볼 점이 많다. 어쩌면 현대 문명은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과학으로 확장되는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1772년 독일 하노버 출신의 22세 여성 캐럴라인 허셜(Herschel)이 영국에 도착했다. 어린 시절에 병으로 키 130cm에서 성장을 멈춘 그녀는 한쪽 눈의 시력마저 잃은 상태. 어차피 사회생활이나 결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더 이상 교육하지 않고 집 안에서 허드렛일에 부렸다. 이런 그녀를 보다 못해 영국으로 데려온 것은 영국에 먼저 정착했던 오빠 윌리엄 허셜이었다. 24개의 교향곡을 작곡할 정도로 꽤 재능 있는 음악가였던 윌리엄은 동생이 영국에 도착하자 음악부터 가르쳤다. 이렇게 그녀는 오빠가 지휘하는 공연에서 가수로 데뷔하며 비로소 세상과 만나기 시작했다.
당시 윌리엄은 음악보다 과학에 더 관심이 있었다. 스스로 망원경을 제작한 그는 여동생에게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치며 천문 관측에 동참시켰다. 오빠를 적극 도운 캐럴라인은 1781년 윌리엄이 천왕성을 발견하는 데 이바지한다. 캐럴라인이 혼자서 관측할 수 있게 되자, 윌리엄은 동생에게 새 망원경을 만들어주며 응원했다. 점차 독립 연구자로 성장한 캐럴라인은 한 번도 관측된 적 없던 혜성들을 발견해 세상을 놀라게 한다. 그녀의 혜성들은 런던 왕립학회 학술지에 출판됐다. 캐럴라인은 1797년까지 8개의 혜성을 발견하고 14개의 새로운 성운도 찾아냈다. 부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캐럴라인은 이제 당대의 과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천문학자가 되었다.
캐럴라인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재정적으로도 자립하길 원했다. 천왕성 발견으로 스타가 된 오빠 윌리엄은 왕실에 가서 새로 발견된 혜성들이 동생의 업적이라고 소개했다. 이후 캐럴라인에게 정식 급여가 지급되기 시작한다. 남성 과학자들도 지원받기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캐럴라인은 영국에서 공식 직책을 맡은 최초의 여성이 됐다. 천문학자로 급여를 받기 시작한 최초의 여성이기도 했다. 1828년 영국 왕립 천문학회는 여성 최초로 캐럴라인에게 메달을 수여했다. 그녀 다음에 여성이 이 메달을 받은 것은 168년이 지난 1996년 베라 루빈(Rubin)이다.
캐럴라인 허셜을 이은 여성 천문학자 베라 루빈은 엔비디아가 차세대 ‘GPU(그래픽 처리장치)’로 발표한 ‘루빈’이라는 모델명으로 등장한다. 이번에 딥시크가 사용한 엔비디아 칩은 ‘호퍼 GPU H800’이다. ‘코볼’이라는 프로그램 언어를 만들고 ‘디버깅’이란 용어를 만들어낸 전설적인 여성 프로그래머 그레이스 호퍼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엔비디아는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이름을 딴 GPU도 출시했다. 시인 바이런의 딸로 태어나 수학자로 성장한 에이다는 인류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불린다. 이처럼 현재 세계 인공지능 시장을 지배하는 엔비디아의 칩은 자신들의 지향점을 담고 있다.
지난 2월 11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여성 과학인의 날’이다. 그런데 유네스코(UNESCO)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여성 과학 연구자 비율은 2022년 기준 22.2%로 세계 최하위권이다. 인구의 절반이 여성이고, 과학이 여성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여성 과학 연구자 비율이 영국은 38.7%, 스위스는 37.5%로 우리나라보다는 확실히 더 높다.
2022년 OECD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도 우리나라는 성별에 따른 수학·과학 성적에 차이가 거의 없었다. 수학 점수는 남성이 조금 높았지만, 과학은 여성이 약간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세계 물리학계를 이끌며 무려 200여 명의 노벨상을 배출한 미국물리학회의 2024년 회장을 맡은 인물은 한국인 여성 김영기 시카고대 석좌교수다. 카이스트 차미영 교수는 세계적인 연구기관인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연구단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올해 한국물리학회의 회장은 윤진희 교수가 맡았다.
우리나라에서 여성 과학자가 적은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전문가들은 어릴 때부터 여성들이 이공계 분야를 하지 않도록 권유받고 있다. 설사 이공계 분야에 진출하더라도 여러 불이익에 직면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인 최초로 엔비디아의 선임 디렉터로 합류한 인공지능 분야의 세계적인 연구자 최예진 교수는 어린 시절 모형 항공기 대회에 나갔다가 여자가 왜 왔냐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엔비디아가 그랬듯이, 어떤 인물을 기념하는지는 그 사회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지폐의 가장 고액권 인물인 신사임당은 양성평등을 상징한다고 발표되었지만, 실제로는 여성의 미덕은 현모양처라는 이미지를 준다.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한다. 그런데 천재는 남자만 있는 게 아니다. 천재가 날 확률도 드문데, 한쪽 절반에서만 찾아서는 힘들 것이다. 이번에 딥시크 충격을 준 중국의 경우 여성 과학자의 비율은 40%가 넘고, 특히 석사급 이상 이공계 대학원에 진학하는 여성의 비율은 50% 이상이라고 한다. 외부에서 이런 충격을 받을 때마다 우리 사회는 늘 과학 인재 양성을 외치지만, 농경사회에서나 필요했던 가부장적 여성관을 극복하지 않고 과학 생태계가 다양성을 품지 못한다면, 무한 경쟁의 시대에 미래 먹거리를 찾는 시도는 공허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엔비디아와 딥시크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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