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0일부터 이틀 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주요국 정상, 기업·대학의 AI 전문가들이 모여 안전한 AI를 위한 협력을 논의하는 파리 AI 행동 정상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번 회의는 2023년 11월 영국, 2024년 5월 서울 회의에 이은 세 번째 회의로, 행사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 회의 때 논의된 AI 안전을 위한 조치와 계획들이 얼마나 실행되었는지 확인하는 자리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결과는 “AI 안전성 시대는 저물고 국가 간 AI 경쟁 심화 시대의 시작”이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기조연설은 안전보다는 향후 167조원 투자를 통해 프랑스 AI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AI 법안을 통해 강력한 규제 중심의 전략을 세운 EU 또한 EU 역사상 최대 규모인 총액 300조원 AI 투자를 선언함으로써 AI 레이스에 본격 참전했다. 더욱 눈에 띈 것은 미국이다. 2기 트럼프 행정부 시작과 동시에 AI 안전 및 규제와 관련된 거의 모든 행정명령을 철회한 미국은 이번 정상회의에서도 예상 이상의 움직임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을 대신해 참석한 밴스 부통령은 현장에서 ‘미국 먼저’(America First)와 미국의 AI 리더십을 강조하고, EU의 과도한 규제가 AI의 발전을 저해한다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회의 결과 선언 서명에 거부하는 결정을 내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영국의 움직임이다. 영국은 AI 안전성 분야의 글로벌 리더로서 미국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안전한 AI를 위한 질서를 주도해 나갔다. 그런데 이번 정상회의의 선언에 미국과 함께 서명에 참여하지 않으며 전 세계에 충격을 선사했다. 그리고 첫 후속 조치가 세계 최초 AI 안전 연구소인 영국 AI안전연구소의 명칭을 ‘AI보안연구소’로 개명하여 역할도 안전성보다는 보안과 안보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에 영국 정부가 발표한 AI 기회 행동 계획을 보면 AI 인프라와 데이터센터 등에 45조원 규모의 정부 투자 계획을 포함하고 있는데, AI 안전성 리더십보다 글로벌 AI 경쟁에 무게를 둔 것으로 보인다. 밴스 부통령 비판 이후 EU가 AI 책임 법안과 추가 개인 정보 규제 법안을 철회한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올해 1월 초까지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경쟁적인 투자 흐름이다. 동력이 무엇일까? 필자는 그 답을 딥시크에서 찾는다. 작년 12월 딥시크가 DeepSeek-v3라는 초거대 언어 모델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최고 수준의 AI가 미국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 오픈AI o1, 구글 제미나이 2.0은 폐쇄형 AI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보여주고 있고, 메타의 라마는 사실상 전 세계 오픈소스 AI 생태계의 중심이었다. 둘 다 미국 빅테크의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로만 가능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DeepSeek-v3가 공개되며 분위기가 급변했다. 잘못 알려진 내용이긴 하지만 개발 비용 80억원에 GPT4o급 AI를, 그것도 강력한 GPU 수출 통제 환경하에서 만들어 냈다는 점, 그리고 기술적으로 세부적인 내용까지 오픈소스로 공개했다는 점이 전 세계에 충격과 희망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1월 중순 딥시크는 수학·과학 등 일부 AI 능력 평가에서 오픈AI의 o1을 능가하는 추론적 사고가 가능한 DeepSeek-R1을 오픈소스 형태로 공개했다. 이는 미국처럼 천문학적 규모가 아니어도 일정 수준의 개발 역량이 있는 국가라면 수조 원 정도의 투자로도 미국에 필적하는 AI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오픈소스 AI 생태계는 이제 미국과 중국 양강 구도로 재편되고 있다. 즉 지금 뒤처진 국가는 AI 경쟁에서 완전히 밀릴 수 있다는 의미다.
챗GPT 출시 이후 필자는 저서 ‘AI 전쟁’을 통해 국가 간 AI 경쟁의 심화를 예상한 바 있다. 이때가 글로벌 AI 전쟁 제1부였다. 그리고 딥시크 등장과 파리 AI 행동 정상회의 결과는 AI 전쟁 2부의 시작을 알린다. 심화된 글로벌 AI 전쟁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국·프랑스·캐나다·일본·EU 등의 움직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모두 AI 컴퓨팅 인프라 강화를 위해 최소한 수조에서 수십조 원 규모 정부 투자를 진행하고 민간 및 해외 투자를 유치 중이다. 컴퓨팅 인프라는 최고 수준 인재와 기술 기업 양성에도 필수적이다. 재능 있는 인재들이 충분한 GPU로 다양한 시행착오 경험을 겪어야 역량이 축적되고 혁신적 기술 개발이 가능하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 정부가 발표한 올해 내 GPU 1만5000장 확보 계획은 의미 있는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규모가 더 커지고 속도가 빨라질수록 좋다.
하지만 소수의 GPU를 최대한 다수에게 나눠주는 정책만으로는 혁신을 만들기 어렵다. 기술력이 검증된 소수에게 대규모 GPU를 안정적으로 제공해서 최고 수준의 AI 개발에 집중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렇게 개발한 강력한 AI는 상업적 활용이 가능하도록 공개해 최대한 많은 스타트업과 대학, 연구소가 이를 활용하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노력이 한국형으로 머물러선 안 된다. 아세안·중동·중남미 국가들과 연대를 통해 이 국가들이 보유한 문서 데이터를 디지털화하여 대규모 비영어권 학습 데이터를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활용한 오픈소스 AI 프로젝트를 우리나라가 주도해야 한다. 다양한 국가 가치관과 문화를 대변하고, 강력한 추론적 사고가 가능한 포용적 AI를 공동으로 개발하고, 다양한 산업에 확산시키자는 프로젝트다. 이 AI 동맹은 미국·중국·EU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AI G4 대한민국 실현을 이끌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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