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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2월 유인 우주선 아폴로 8호에서 달의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지구의 모습을 촬영한 장면. /그래픽=이철원

지난 15일 미국의 민간 우주 기업 파이어플라이의 달 착륙선 블루고스트가 촬영한 일식 사진이 전해졌다. 같은 시각 지구에서는 개기월식이 관측됐다. 태양과 지구, 달이 나란히 서면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들어가 지구에서는 월식이지만, 달에서는 지구가 태양을 가리며 일식이 된 것이다. 이처럼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볼 때면 인류는 숙연해지곤 한다. 그런데 이를 가능하게 만든 우주과학은 처음부터 쉬운 게 아니었다. 지금은 민간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지만, 인류가 처음 달에 도전하던 무렵 세계는 이념 대결로 어지러웠다.

1968년 대선을 앞둔 미국은 국론 분열이 심했다. 1967년 한 해에만 150건이 넘는 폭동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1월 30일 음력설을 기점으로 북베트남이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한다. 이때 사이공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베트콩이 침투했다는 소식이 텔레비전에 전해진다. 미국은 충격에 빠진다. 곧 격퇴되지만, 미군이 무기력하게 공격받는 모습은 기름을 부었다. 철군 여론이 치솟자 3월 민주당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재선 출마를 포기한다. 이런 가운데 4월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된다. 6월에는 유력한 민주당 대권 주자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된다. 혼란은 걷잡을 수 없었다.

당시 인간이 달을 탐사한다는 아폴로 계획을 이끌던 NASA(미 항공우주국) 수장 제임스 웹의 고민은 깊었다. 천문학적 예산으로 1961년 케네디가 야심 차게 시작한 아폴로 계획이었지만, 1967년 1월 아폴로 1호 화재로 우주인 3명이 즉사하면서 인간을 달에 보낸다는 계획은 중단된 상태. 베트남도 힘겨웠던 예산 당국은 “달에서 고작 돌멩이 몇 개 가져오려는 이유가 뭐냐”고 따졌다. 여론도 나빴다. 무려 3분의 2가 아폴로 계획에 반대했다. 제임스 웹은 참사 조사에 적극 임하면서 행정가였던 자신에게 책임을 돌린다. 덕분에 NASA 과학자들에 대한 신뢰는 회복되지만, 유인우주선 비행은 일시 중지되고 예산 삭감이 시작된다.

그래픽=이철원

1968년 재개된 두 번째 유인우주선 프로그램 아폴로 7호는 이런 어려움 속에 진행되었다. 투입된 승무원들은 원래 아폴로 1호의 백업 요원이었다. 사고 승무원들은 같이 훈련하던 동료들이었고, 어쩌면 자신들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고 원인을 개선했다는 업체의 말을 곧이 믿지 않았다. 제조 과정에 참여하고, 문제점을 계속 제기하며 훈련을 병행했다. 목숨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아폴로 발사는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실패할 자유는 없었다.

제임스 웹은 아폴로 7호에 엄청난 물건을 싣기로 한다. 방송 카메라였다. 어차피 잘못되면 이대로 끝날 아폴로 계획이라지만, 몇 그램이라도 무게를 줄여야 할 판에 무거운 카메라는 모험이었다. 하지만 승무원들은 받아들이고, 10월에 발사되었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우주에서 승무원들이 태연하게 웃으며 더 많은 지지를 부탁한다는 화면을 지구로 전송하자 여론이 뒤집혔다. 베트남에서 전해진 텔레비전 중계는 실망을 주었지만, 아폴로 7호는 희망을 주었다. 아폴로 7호 승무원은 방송계 최고의 영예인 에미상을 받는다.

이 무렵 소련 우주선이 거북이 두 마리를 싣고 달 궤도를 돌고 귀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더 과감한 도전이 필요했다. 원래 아폴로 8호는 지구 주위를 도는 임무였지만, 바로 달 궤도로 날아갔다. 유인 프로그램이 재가동한 지 불과 두 달 뒤의 일이다. 성공 확률 50%에도 승무원들은 목숨을 걸고 동의했다. NASA는 필사적이었다. 12월 21일 발사한 아폴로 8호의 우주인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성경 읽는 모습을 전 세계에 방송했다. 그리고 달 지평선 너머로 지구가 떠오르는 모습이 지구로 보내졌다. 인류가 처음으로 다른 천체에서 지구를 촬영한 모습이다. 서로 멱살을 잡던 사람들은 넋을 놓고 아폴로가 보낸 경이로움에 빠져들었다.

폭동, 암살, 베트남전, 그리고 유혈 진압으로 끝난 프라하의 봄과 유럽을 휩쓴 68혁명. 세계 곳곳에서 내전에 가까운 분열로 차마 텔레비전 보기가 겁났던 시절, 아폴로가 던져준 메시지는 엄청났다. 12월 27일 아폴로 8호가 귀환하자 사람들은 외쳤다. “잊고 싶었던 1968년을 기억하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1968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은 아폴로 8호 승무원으로 정해졌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기 7개월 전의 일이다. 불가능해 보이던 인류의 달 탐사는 이렇게 현실이 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혼란과 상처는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앞으로 이런 분열이 계속되면 우리 사회가 과연 공동의 목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 두렵다. 아폴로 계획을 주도한 사람들 역시 같은 고민이었을 것이다. NASA 국장 제임스 웹은 과학자가 아니라 행정 관료 출신이었다. 제임스 웹은 사양했으나, 굳이 자신을 임명한 케네디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로 아폴로의 필요성을 설득했다고 한다.

“케네디 당신은 이 프로젝트의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정권은 교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거대 과학은 독재 정권에서나 가능하다는 잘못된 시각이 있다. 권력이 바뀔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가 나치나 소련의 과학에 맞서지 못하면 그것이 바로 체제의 위기다.” 이에 적극 호응한 케네디는 아폴로 계획을 승인한다. 이후,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목표에 도전하는 것을 ‘문샷(Moonshot)’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도 통합을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아폴로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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