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여성이 응급실에 찾아왔다. 환자 분류소에서 응대하던 간호사가 진땀을 흘리며 들어왔다. 환자가 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한다고 했다.
“당한 게 아니라 주장을 한다고요?” “어젯밤 기억이 전혀 안 나는데 가능성이 있대요. 그런데 외국인이에요. 영어로 의사소통이 힘들어서 직접 이야기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
환자 분류소로 나가면서 원칙을 복기했다. 체계가 있으니 외국인에게도 적용하면 될 것이었다. 분류소에는 파란 눈의 금발 여성이 앉아 있었다. 성인이 되고 워킹 홀리데이로 한국에 왔다고 했다.
“기억이 안 나신다고 들었어요. 어젯밤에 술을 마셨나요? 혹시 많이 마시지는 않았나요?” “술집에서 술을 마셨어요. 평소보다 많이는 아니고요. 그런데, 정말 기억이 끊겨버렸어요.”
“수상한 사람을 만났거나 모르는 약물을 먹었나요?” “그것도 기억이 전혀 안 나요. 눈을 떴더니 처음 보는 차 안이었어요.”
누군가에게 황당하게 들릴 말이었다. 하지만 실제 약물에 당했다면, 먹은 후뿐만 아니라 이전의 기억까지 사라질 수 있다.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상황은 무엇인가요.” “마지막 기억은 술을 마시고 있던 거예요. 정신을 차려 보니 아침이 되어 있고 낯선 차 안이었어요. 모르는 남자가 안에 있는 것 같았어요. 바로 도망쳐서 나왔어요.”
“없어진 건 없나요? 옷이 달라지거나 느낌이 이상하지는 않은가요?” “소지품은 그대로였어요. 기억이 없어졌으니까 느낌도 이상하긴 한데, 정말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하지 않네요.” “맞아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신을 이렇게 잃을 수가 없어요. 또 왜 하필 낯선 차에 있었겠어요. 무서운 일이잖아요.”
충분히 가능하고, 충분히 이상한 상황이었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산부인과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료는 가능합니다. 일단 저희가 호출한 여성 경찰이 동행할 겁니다. 신체 검진과 산부인과 진료를 시행하고 성병 검사를 받고 응급 주사나 피임약을 처방받을 수 있습니다. 증거를 채취해서 보관하기도 할 겁니다.”
“약물에 대해서는요?” “소변으로 약물 키트를 돌려서 몇 종의 약물을 검출해 볼 수 있습니다.”
“정확한 검사는 아니네요?” “그러려면 경찰의 협조를 얻어서 과학 수사대에 보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원한다고 즉시 혈액을 분석해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죄송하지만, 일종의 한계입니다.”
그녀는 잠시 옆의 벽을 바라보며 고민하다 답했다.
“솔직히 경찰서에 먼저 들렀어요. 여긴 그래도 내 말을 믿어주기라도 하네요. 어차피 경찰을 불러야 한다는 거죠? 진료는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뭐, 살아남았잖아요. 지금 죽지 않고 멀쩡하잖아요. 괜찮겠죠.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살아남았다는 단어를 강조하며 떠났다.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적절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와 면담은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지도 않았다. 아마 나는 그녀에게 원칙을 설명하던 외국 의사 A로만 기억될 것이다.
그녀는 실제 살아남았다. 그리고 아픈 곳도 없었다. 그러면 어떠한 일도 없었던 것인가? 그녀는 굳이 이 응급실 문턱을 넘은 사람이다. 아마 그녀의 주장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고 나는 실제 의사 A에 불과하다. 만약 범죄가 맞다면 그녀는 집요한 범죄의 끔찍한 희생자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같은 상황을 마주해도 언제까지나 나는 의사 A에 불과할 것이다. 이 또한 일종의 한계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