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친구가 있다. 그녀가 비건이 된 건 실직 후, 사람에게 갈 곳 없던 마음이 동물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이민을 간 한 친구는 언어와 문화 차이 때문에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는데, 그때 그녀를 지켜준 건 방과 후 특별활동이었던 수영이었다.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물살을 가르며 마음을 다잡았다는 것이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건 불행이 아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불행’이다. 예측 불가능성은 인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일관되지 않은 불안정한 부모의 애정이 아이의 내면을 망친다는 건 심리학계의 정설이다. 저출산의 기저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지금 ‘일한다’는 곧 ‘새로 배운다’는 의미와 동일해졌다. AI 같은 기술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과거에 익힌 것들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 탓에 현대인들은 변화의 불안을 견디기 위해 특정 생활 방식, 즉 루틴에 집착하는 경향이 커졌다. 통제를 통해 안정을 얻기 위한 것이다.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에서 악셀 하케는 “어떤 이들은 영양 섭취 면에서 극단적인 방법만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 믿는다. 정치적 올바름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언어에 엄격한 법칙을 정해 놓고 이를 지키려 한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자신을 불안정한 존재로 느끼기 때문에 안전하고 확실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운동 중독, 채식주의, 외국인 혐오나 정치인 팬덤 같은 사회 현상을 이해해볼 수 있다.
불안한 시대를 건너기 위해 나만의 안전지대를 찾는 건 중요하다. 그것이 매일 한 개의 사과를 먹는 일이든, 만 보씩 걷는 일이든, 환경보호 단체에 참석하는 것이든 상관없다. 문제는 극단에 있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다. 육식하는 사람을 혐오하거나, 타 종교를 이단이라 배척하고, 운동하지 않는 사람을 게으르다고 비난하는 식 말이다. 사람마다 보호색은 제각각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오독하는 확신범들이 많을수록 오해는 이해의 강에 이르지 못한다.